때론 시대의 마취제로 때론 가슴뭉클한 드라마로 야구엔 삶 어루만지는 감동이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 돌직구밖에 몰랐던 아빠와 딸 굴곡진 공의 궤적, 변화구 속엔 미처 표현못한 사랑이…
도대체 야구란 무엇일까? 많은 이가 인생이라고 했다. 어느 스포츠에 ‘각본 없는 드라마’와 ‘인생 역전의 꿈’이 없으랴마는 야구의 묘미는 바둑의 수싸움처럼 도전과 응전의 전략이 즉각적으로 실행된다는 데에 있고, 10대 0으로 이기고 있거나 지고 있는 9회 말 투아웃에서도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는 데에 있다. 연습생이 이룬 신화나 퇴물 선수의 기적 같은 재기가 펼쳐지는 ‘꿈의 구장’이 야구의 그라운드이기도 하다. 8대 7의 ‘케네디 스코어’가 주는 재미가 있는 반면, 어떤 팬들은 ‘1대 0의 팽팽한 투수전이야말로 ‘진짜 야구’라고 하기도 한다. 10번 중 7번을 실패하고 3번만 성공시켜도 ‘이겼다’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스포츠 종목도 야구가 유일하다. 아웃을 당하는 게 목표인 작전(희생타나 진루타), 차라리 상대를 진루시키는 게 나은 상황(사사구 작전)도 야구만이 주는 재미 중 하나다. 홈런보다 번트가 필요하고, 스트라이크보다 볼을 던져야 될 때도 있다. 다이아몬드에선 ‘합법적 절도’(도루)도 허용된다.
인생을 다루는 영화도 야구 얘기를 안 할 수 없었다. 아예 그라운드와 라커룸에 카메라를 갖다댄 작품도 있고, 간접적으로 소재 삼은 영화도 있다.
먼저 한국 영화 관객에게 야구란 무엇일까? ‘시대’였다. 할리우드 야구영화와 다른 점은 한국 영화에서 야구는 종종 ‘시대’의 상징으로 다뤄졌다는 것이다. 조승우, 양동근 주연의 ‘퍼펙트게임’은 최동원과 선동열의 강속구 인생으로 관객을 1980년대로 데려간다. 고교야구의 기린아였던 선동열을 자신의 대학 야구팀으로 데려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그린 ‘스카우트’. 1980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야구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광주 민주화운동)과 만난다. 군사독재 정권의 우민 정책의 일환으로 탄생한 한국 프로스포츠의 태생적 비애가 이들 작품 속에는 녹아 있다. 분명 야구는 권력이 한국 사회에 투여한 ‘마취제’였지만, 대중은 그것으로 위안 삼고 엄혹한 시기를 견뎠다.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한국 영화에서도 야구의 그라운드는 ‘퇴물’과 사고뭉치 선수가 재도전을 펼쳐가는 가슴 뭉클한 드라마의 무대로 가장 각광받았다. ‘글로브’와 ‘투혼’이 그랬다. ‘아는 여자’는 퇴물 투수의 연애담이었다. 할리우드 영화로는 야구영화의 고전인 ‘내추럴’과 ‘19번째 남자’ 등이 대표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천방지축 안하무인인 겁없는 신인들은 대개 컨트롤이 엉망인 대신, 굉장한 강속구 능력을 지닌 투수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메이저 리그’의 찰리 신이 딱 그런 역이었다. 야구가 인생을 닮았다면, 누구나 ‘돌직구’밖에는 몰랐던, 힘과 속도만으로도 세상이 만만해 보였던 청년기가 있지 않은가?
29일 개봉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에이미 애덤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야구로 화해한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를 그렸다. 직진밖엔 몰랐던 부녀의 삶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평행선만 그렸다. 오랜 상처 속에 아파하고 번민했던 두 사람을 구원한 것은 ‘변화구’였다. 평생 메이저 리그 스카우트로 활동하며 야구에 미쳐 전국을 돌아다닌 노년의 남자,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딸이 마지막 스카우트 여행에 동행하며 서로의 오랜 상처를 들여다보게 된다. 직구 같았던 그들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였다. 공기의 작은 소용돌이를 타고 회전하며 공이 그리는 곡선은 아름다웠다. 굴곡진 공의 궤적 속에서 노년의 남자는 마침내 딸의 눈을 봤다. 그 속엔 아버지의 사랑을 간절하게 원하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다 큰 딸도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본 우회로에서야 아버지를 마주했다. 거기엔 9회 말 투아웃 마지막 공을 남겨놓은 마운드 위의 투수처럼 평생 전투 같은 인생을 살아온 외로운 사내가 서 있었다.
당신 인생은 직구일까, 변화구일까.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한방의 홈런일까, 가벼운 번트일까. 당신 곁엔 선발투수가 있어야 할까, 구원투수가 있어야 할까. 당신의 인생은 지금 몇 회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