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7회> 모든 길은 하나로! (26)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함께인 것 같으면서도 혼자 걷는 길은 얼마나 쓸쓸할까. 홀로 있는 곳에서 오히려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역설이 있지만, 여러 사람들 틈에 뒤섞여 있으면서 문득 혼자임을 깨달을 때엔 배신감마저 들게 된다.

본인도 모르게 은근슬쩍 왕따가 되어버린 한승우 실장은 심기가 영 불편하기만 했다.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정진하던 공부를 때려치운 까닭은 ‘유민그룹 전략기획실장’이라는 번듯한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란 유혹 때문이었다.

‘이런! 유민 제련그룹을 통합한 기획실의 수장이 된 줄 알았더니… 정체도 분명치 않은 골프선수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는 신세가 되었군.’ 그는 이렇게 한탄했다. 겨우 1년 6개월 전만 해도 그는 이혼을 결정한 재벌 마나님의 핸드폰 단축번호에 0번으로 등록된 사람이었다. 그 재벌 마나님의 어깨너머로 들여다보았던 제련그룹의 조직도는 야전사령관의 책상 위에 펼쳐진 전략지도처럼 굵은 선, 가는 줄로 복잡하게 얽혀있지 않았던가.

한승우는 재벌 마나님 신희영에게 얽혀들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직원 수 3,000명을 넘어서는 막강한 회사의 조직도를 그에게 보여주며 맨 위로부터 두 번째 줄을 유심히 보라고 했다. 견출고딕체의 굵은 글씨로 쓰인 ‘전략기획실’ 아래에는 이미 기록되어 있던 전략기획실장의 이름이 빨간 사인펜으로 짓뭉개져 있었다.

“전략기획실? 여긴 대표이사와 직속으로 이어지는 자리 아닌가요?”

그날, 한승우는 이렇게 물었고,

“그래, 앞으로 한승우 군의 명함에는 전략기획실장이란 직함이 새겨질 거야.”

신희영은 이렇게 대답했다. 겉으로는 단순히 질문하고 대답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두 사람은 눈으로 욕정과 야심을 교환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럼 제가 벼락같이 취직을 하게 되었단 말씀인가요?”

“취직 정도가 아니라 출세가도가 한 군 앞에 펼쳐져 있어. 30대 초반에 별을 달게 되는 것이지. 당장 짐 싸들고 와요.”

빨갛게 짓뭉개진 전임 전략기획실장의 이름 위에 ‘한승우’라고 쓰인 글씨를 보면서 그는 벅차기도 했지만 놀라움에 한동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돌이켜보건대 바로 1년 6개월 전의 사건이었다.

물론 재벌 마나님 신희영의 야시시한 본심을 알아챈 것은 그보다도 훨씬 전, 베트남 내해에 머물던 크루즈 여객선의 특등실이었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투명한 옷 속으로 빨간 브래지어를 드러내보이던 그녀가 한승우의 손을 젖가슴 위로 잡아끌던 그 때는, 속칭 3학년 1반짜리 골든 총각 즉, 한승우의 나이 서른한 살을 겨우 넘어선… 생선처럼 팔팔하던 무렵 아니었던가.

이를테면 그는 요 근래 1년간을 억장이 무너진 채로 살아오던 중이었다. 재벌 마나님과 그녀의 어린 딸에게 동시패션으로 이용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곤 했으므로. 찬란하던 전략기획실장 자리는 허울뿐이었고, 재벌 마나님에겐 사냥 끝낸 사냥개일 뿐이었으며,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놓은 줄 알았던 유한솜마저 다른 남자에게로 날아가 버렸으니…

하지만 인생은 뒤집어지는 재미가 있어서 극적이라고들 한다. 한승우는 너무도 우연한 기회에 인생을 뒤집을 만한 건수를 잡았는데…

모녀간에 싸움을 했던가? 신희영에게 당장 현금으로 3,000만원을 내놓으라며 으름장을 놓던 유한솜의 목소리가 유별나게 컸던 그날,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 더 이상 묻지 말고 돈을 내놓으라는 딸의 목소리는 절절했다. 하지만 한승우를 솔깃하게 만든 것은 넋 놓은 듯이 중얼대던 그녀의 말끝이었다.

“돈이 한 푼도 없어? 좋아요, 내가 그까짓 거 못 구할 줄 알아? 누가 3,000만원을 준다면 몸이라도 팔 거라고! 신체 포기각서를 쓰라면 쓰고…”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재벌 딸의 신체 포기각서는… 매우 구미 당기는 문서였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재벌 딸의 신체 포기각서는… 매우 구미 당기는 문서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