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巖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삶과 역정

부친 따라 일본으로 간 소년 징집 피하려 소결爐서 근로봉사 처음으로 鐵 접하게 된 계기

日자본·기술지원 약정 끌어내 선조들의 피의 대가로 건설 실패 땐 영일만에 투신하자 죽을 각오로 건설현장 매진

공정 80% 진행된 구조물도 부실 발견 땐 가차없이 해체 靑巖의 완벽주의 성공 디딤돌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바친 청암(靑巖)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군인과 기업인, 정치인으로서 평생 선이 굵은 삶을 살아왔다. 특히 포스코를 탄생시킨 기업인으로서 삶은 청암에게 ‘강철왕’이란 별칭을 선물할 정도로 그의 인생 전반을 지배했다. 청암의 인생에 가장 큰 화두였던 철(鐵)과 인연은 그의 유년시절에서부터 비롯된다.

지난 1933년 아버지 박봉관 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청암은 이야마북중학교 4학년 시절 소년병 징집을 피하려고 근로봉사를 가게 된다. 이때 청암은 일본소결철강주식회사 소결로에 배치되는데, 이곳이 바로 청암이 처음으로 철을 접하게 된 장소다. 평소 수학에 재능이 있었던 청암은 소결로 온도와 관련한 방정식이나 소결로 내 화학적 반응 등 소결로 작업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심지어 청암의 과학적 호기심은 생산성 향상에도 도움이 돼 월간 생산량 우승자로 뽑히기도 했다.

이런 청암을 눈여겨본 사람이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지난 1964년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청암을 눌러 앉힌 후 일본 특사로서 10개월간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일본 전역을 순방하도록 지시한다. 제철소에 대한 정보수집과 견문 축적을 위해서다. 이때 청암은 평생 은인 중 한 명인 야스오카 세이도쿠(安岡正篤)를 만나게 된다.

당시 한국 정부는 자유당 정부 시절부터 일관제철소 건설을 줄기차게 시도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박 대통령 시절에도 미국 코퍼스(Koppers)사를 간사로 한 대한국제차관단(KISA)이 구성됐지만, 자본과 기술공여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세계은행(IBRD)이 ‘한국의 종합제철소 사업은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자 KISA의 차관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당시 청암은 KISA의 결정을 듣고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다. 코퍼스 사의 대표였던 포이 회장이 청암에게 ‘머리도 식힐 겸 이컨 부사장의 콘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청암은 대일청구권자금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 자금으로 전용하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하게 된다. 자금 전용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협력이 절대적이었는데, 당시 야스오카는 일본 재계의 실력자들에게 청암을 도와달라고 권유했다. 또 청암이 정부 주요인사들을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하기도 했다. 그 결과 청암은 일본철강연맹으로부터 한국의 제철소에 자본과 기술지원을 하겠다는 내용의 약정서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청암은 자금 확보뿐 아니라 제철소 건설 과정에서도 여러 고난을 겪게 된다. 두주불사(斗酒不辭)로 유명한 그가 좋아하던 술까지 끊고 제철소 건설 현장에 매달렸을 정도다. 특히 청암이 포항제철소 건설 초기 임직원들을 상대로 강조했던 ‘우향우 정신’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청암은 1968년 6월 제철 건설요원들을 새벽부터 불러모았다. 청암은 직원들 앞에서 “우리 선조들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인 만큼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투신해야 한다”고 외쳤다.

죽을 각오로 제철소 건설을 성공시켜야 할 만큼 당시 청암의 심정은 절박했던 것이다. 당시 배우자인 장옥자 여사가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청암의 종교를 ‘쇠(鐵)’라고 답했을 정도로 청암의 머릿속엔 온통 철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제철소 건설에 대한 강한 의지는 청암의 완벽주의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1972년 제강 공장 건설현장에서는 헐거운 볼트를 발견한 즉시 직원들에게 이 공장에 들어가는 24만개의 볼트를 모두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또 1977년에는 발전 송풍설비 콘크리트 구조물 공사에서도 볼트 조임부터 콘크리트 외관까지 공사가 부실한 모습을 보이자 공정이 80%나 진행된 설비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기도 했다.

제철소 건설에 고생을 한 만큼 애착도 컸던 걸까. 청암은 지난 1973년 6월 제1고로에서 첫 쇳물이 나오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은 청암이 일생을 통틀어 흘린 세 번의 눈물 중 하나다.

청암의 완벽주의로 태어난 포스코는 1970년대부터 우리 산업에 철이라는 기초 소재를 차질없이 공급해 한국의 산업구조가 1차산업에서 2차 제조업 중심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했다. 지금은 전 세계 철강사 순위 업계 1위(월드스틸다이내믹스(WSD) 2012년 기준)를 차지한 한국의 대표기업이 됐다. 청암의 열정과 투지가 결국 생소했던 제철 산업을 한국 대표산업으로 우뚝 서게 한 것이다.

<신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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