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 붉은 길, 푸르른 마음 (54)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내가 남아공에 가려는 걸 어찌 알고서 이렇게 비행기 티켓을 구해왔어? 빈자리가 없어서 대기 중이었는데 정말 잘 되었군.”
모골이 송연하다고 해야 하나? 유민 회장은 머리털이 쭈뼛하게 솟아오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모름지기 지겟작대기를 함부로 휘둘러 여자에게 몹쓸 짓을 저지른 전력의 소유자는 언제나 두려움에 떨며 지내게 마련인 법이다.
“다 아는 수가 있지요. 그나저나 남아공까지… 어째서 이토록 급하게 출장을 떠나시는 건가요? 아드님 때문에? 혹시 미녀 골프선수 때문에?”
다 알고 있으니 이실직고 하라는 투로 현성애가 물었다.
“뭐라고? 미녀 골프선수? 아! 그 아가씨?”
좀 전에는 머리카락이 쭈뼛 올라가더니 이번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녀 골프선수라면 의당히 강유리를 말하는 것일 텐데… 내력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유민 회장이 강유리 때문에 현성애를 걷어 찬 꼴이 되어있었으니 둘 사이에는 또 다른 연적관계가 성립되는 셈이었다. 그러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밖에.
“그래요. 그 예쁘고 늘씬한 골프선수가 회장님 눈에 아른거려서 도통 일손이 잡히질 않으시던가요?”
“그게 뭔 소리야? 남아공에는 아들 녀석도 가 있고… 마누라도 가 있어요. 설혹 미녀 골프선수가 마음에 있다 한들 마누라 앞에서 뭘 어쩌라고? 전방 100미터 앞에 마누라가 보이기만 해도… 에그!”
유민 회장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아예 진저리 치는 흉내를 냈다. 은연중에 마누라라면 신물이 난다는 걸 드러내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드님 때문에 이토록 허겁지겁 남아공까지 달려가는 건 아닐걸요? 혹시 남아공의 그 유명한 레전드 골프장의 400미터 절벽에서… 웬수같은 사모님을 슬쩍 밀어버리려는 건 아닌가 몰라. 그럴 리야 없겠지만.”
처음엔 모골이 송연해졌다가 이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이번엔 기절초풍 할 지경이었다. 말끝을 흐리면서 혼잣말처럼 입속에서 우물거리긴 했어도, 따지고 보면 그녀는 거침없이 악담을 내뱉는 중이었다.
“이봐요, 현 양… 날 찾아 온 이유가 뭐야? 어째서 내 뒤를 낱낱이 캐고 다니면서 괴롭히는 거요?”
유민 회장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하지만 현성애는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마치 함께 여행이라도 떠나려는 것처럼.
“역시 내 추측이 맞나보죠? 하긴 레전드 골프장의 아찔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날엔 뼈도 못 추릴 거예요. 하지만 골프 라운딩 중에 실수로 떨어지는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요? 옛날 옛적에라도 말예요.”
유민 회장은 순간 입 속의 혀 바닥까지 바싹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무슨 꿍꿍이를 품고 접근 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만 했다. 400미터 절벽이라면… 레전드 코스의 19번 홀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파 3홀로서 티잉그라운드는 절벽 위에, 그린은 절벽 아래에 놓여있는데 고도의 차이가 무려 430미터에 달하는 곳이다.
티잉그라운드에 서서 내려다보면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뒤집힌 하트 모양의 그린이 앙증맞게 보이는데, 그 아찔함에 티샷하는 사람마다 뒤로 멀찌감치 물러설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다. 티샷한 볼이 그린에 떨어지는 시간도 약 20초 가까이 걸린다는 그런 곳에서 발을 헛디디면 절대로 목숨을 보장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따위 엉터리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400미터 절벽 위에서… 감히 누가 누구를 떼민다고 그래?”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왔던 꿍꿍이를 들킨 것처럼 유민 회장의 얼굴은 화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계속>
mee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