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9회> 붉은 길, 푸르른 마음 27
지구본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이 세상 땅덩이가 참으로 만만하게 여겨지곤 한다.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기만 하면 제풀에 뱅그르르 돌면서 어느새 아시아, 인도를 지나 아프리카 대륙이 펼쳐지곤 하는 것이다.
“세상 참 좋아졌어요. 전화 한 통으로 항공편을 예약하고, 리무진이 공항까지 모셔다주고, 기내에서 밥 한 끼 먹고 영화 한 편 보고 나면 남아공에 도착한다니까? 지구별은 우리 꿈을 펼치기엔… 너무 작아요.”
신희영은 골프 전지훈련장소 바꾸기를 마치 손가락으로 지구본 돌리는 정도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비좁은 이코노미석에서 발도 제대로 뻗지 못한 채 종일 버텨야 하는 다른 이들은 죽을 맛이었다. 짐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여덟 세트나 되는 골프채와 보스턴 백만 해도 이삿짐 수준이었지만 신희영 개인 짐만 해도 1톤 트럭을 족히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직항편으로 가나요?”
“직항편이 얼마나 비싼 줄 아세요? 조금 번잡하긴 해도 홍콩에서 한 번만 갈아타면 반값으로 갈 수 있다고요.”
“어쩐 일로 우리 신 여사님이 교통비 걱정을 다 하십니까?”
“글쎄 말이에요. 한강물은 말라도 내 수중의 돈은 마르지 않을 줄로만 알았는데… 자칫하다간 거덜 나겠어요. 하루빨리 이혼이 성사되어서 위자료를 두둑이 받을 때까지는 아껴 써야만 한다고요.”
“그래도 유호성, 강유리 선수는 비즈니스석을 끊어야겠지요? 우리 신 여사… 아니, 회장님이야 물론 1등석으로 끊어야겠지만.”
“안 돼요, 나와 호성이만 비즈니스석으로 끊고 나머진 모두 이코노미로 끊으세요. 당분간 내핍생활로 버텨야 합니다.”
“나도… 비즈니스석으로…?”
“미안하지만 이코노미석으로 오세요. 강유리 선수와 매니저 백광돌 씨, 한승우 실장, 천 부장, 공 과장… 모두 인솔 좀 하시고요.”
“한솜 양은 어떡하지요?”
“아! 한솜이가 있었네. 그 아이는 오빠와 함께 앉히세요. 오랜만에 남매가 사이 좋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강준호가 묻고 신희영이 대답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사람은 총무업무를 담당하는 조 차장이었다. 이크, 야단났네… 그는 이미 예약해 놓은 항공편을 수정하기 위해 은근슬쩍 신희영의 곁을 빠져나왔다. 신희영의 의중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까닭이었다.
“천 부장님! 따끈따끈한 뉴스가 떴습니다.”
조 차장은 항공편 예약을 수정하러 가던 중에 만난 천 부장에게 바짝 다가서서 귀엣말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무슨 뉴스?”
“강준호 프로가 방금 묵사발 됐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강유리 선수도 물먹었고요, 한 실장, 백 매니저… 전부 엿 됐습니다.”
“그래? 거 참 잘되었네. 속이 다 시원하군. 그동안 그 양반들… 회장님 치마폭에 안겨서 눈꼴시게 놀았지. 암!”
“그러게 말입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해요. 아들이 나타나니까 전부 물 먹고 엿 되는 꼴이라니! 우하하!”
얼마나 통쾌했을까? 그들의 웃음소리가 한동안 그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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