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 취미로만 여겨지던 자수를 학문으로 체계화…정영양 숙명여대 자수박물관 관장의 자수인생은…

1967년 전시회를 위해 ‘무궁화’ 수놓은 원피스를 입고 일본땅에…가난한 나라에서 온 여자라는 수근거림에 보란듯이 후원금까지 냈지

생활은 안정적이었지만 1970년대에 바늘·실만 들고 미국으로…우리의 아름다운 자수 문화 전 세계에 활짝 꽃피우고 싶었어

미국서 동양자수 전시때 “기계로 했을것” 비아냥에 참을수 없어 책 출간…한국인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올해의 책’에 선정 기쁨도

세계 최고의 손재주와 기술 가진 한국 명인들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 한평생 외길…설원재단 설립으로 작은 한걸음 내디뎌…

“저 원피스가 1967년도 일본 갈 때 입은 옷입니다. 사진이 없어서 거짓말 같겠지만, 한땐 날씬했죠. 하하. 치맛단에 무궁화를 한땀 한땀 수놓으며 일본 땅에서 ‘이게 우리 국화다’ 하고 자랑하는 제 모습을 상상했죠.”

연구실 한 쪽에 곱게 전시된 긴 검은색 원피스로 한 여인의 젊고 싱싱했던 20대를 유추해 본다. 보통 원피스가 아니다.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박제품이다. 1965년 한ㆍ일기본조약 이후 더욱 거세진 반일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곧 일본 땅을 밟게 될 그 여인이 어떤 마음으로 무궁화를 수놓았을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어쩌면 국제 정세, 한ㆍ일관계 같은 어렵고 복잡한 상황은 애써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숙명여자대학교 자수박물관 정영양(76) 관장이다. 그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전무했던 1965년 서울 원효로에 국제자수학원을 차리고 1967년 일본 수공예협회 초청으로 자수전시회를 열었다. ‘가난한 나라’ 에서 온 여자라는 수근거림에 보란 듯이 후원금까지 기부하고 왔다. NHK에서는 ‘바느질로 번 돈을 쾌척한 최초의 여성’이라며 화제의 인물로 비중있게 다뤘다.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정 관장의 말대로 열도가 들썩거릴 만했다. 정 관장은 뉴욕을 본거지로, 전 세계를 돌며 한국자수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여성의 취미로만 여겨지던 자수를 학문으로 체계화한 후 모든 연구 성과를 다시 고국의 품에 보냈다. 2004년 평생 모은 자수 수집품 600여점을 기증해 자수박물관을 개관한 것. 지난해 설원재단 설립을 통해 국내 수공예인 지원에도 앞장서고 있는 정 관장을 최근 숙명여대 자수박물관 연구실에서 만났다.

▶ ‘충청도 또순이’ 실, 바늘 들고 미국땅을 밟다

“창피하다니까요. 직전까지도 조교들한테 취소하라 그랬어. 내 인생 뭐 할 말이 있다고…. 그래도 이렇게 좋은 전시관 있으니 수공예인들도, 또 일반인들도 와서 많이 활용하셨으면 해요.”

정영양 관장은 서른이 채 되기도 전에 대한민국 유명인사가 됐다. 일본에서 화제몰이를 하자, 청와대에서도 작품 의뢰가 들어왔고 KBS에서는 정 관장을 주인공으로 ‘충청도 또순이’ 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송했다.

한국무역진흥공사에서는 해외박람회 때마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시회도 열 수 있고, 판매도 가능했다. 이제는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받을 만한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사회 진출은 물론이고 해외유학도 흔치 않던 1970년대에 돌연 미국행을 결심한다.

“일본에서 전시회도 하고, 백화점에서 팔기도 하고…. 자수로 돈 벌려면 벌 수도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날 문득, 내가 학원 운영하고 자수품 파는 일에 몰두하다간 우리 자수가 기능에만 머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법도 모르겠고 막연했지만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은 어떤 욕구와 갈증이 있었어요.”

그 갈증은 후에 정 관장이 자수를 체계적인 학문으로 끌어올리는 밑바탕이 됐다. 일본과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고, 청와대 지원으로 의미있는 작품도 여럿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 바라는 건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자수 문화가 현대에도 꽃피우는 것.

“내가 차린 자수학원은 직업학교였어요. 목적이 뚜렷하잖아요. 잘 운영하려면 다니는 학생들을 위한 일감이 필요했죠. 여기저기 찾아다니고 학원생 모으고…. 결국 생계를 위한 자수가 돼가고 있었어요.”

그는 혈혈단신 미국으로 떠났다. 몸에 지닌 것은 바늘과 실뿐이었다. 뉴욕에 거주하는 먼 친척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미국에도 자수와 관련된 학과는 없었다. 그림도 곧잘 그렸던 그는 일단 뉴욕대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게 된다.

“자수 연구는 대학보다는 박물관에서 했어요. 77년도에 메트로폴리탄 의상연구소 고문이었던 다이애나 브릴랜드가 턱하니 어마어마한 자수 유물이 있는 수장고 하나를 맡겼어요.”

하퍼스 바자와 보그 편집장을 거치며 당시 세계적인 패션 에디터로 명성을 떨친 다이아나 브릴랜드(1903~1989)는 메트로폴리탄 의상연구소의 고문을 역임하며 동양자수에 관한 전시회를 기획 중이었다. 그러던 중 뉴욕대학교에 ‘실과 바늘’ 을 잘 다루는 여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정 관장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너무너무 흥분되는 이야기죠. 수장고 관리는 맡았지만, 박물관 소장품이라서 뜯어볼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수집을 시작했어요. 명나라 유물을 제 손으로 직접 다 분해하면서 자수기법, 문양, 배열방식 등을 혼자 공부했어요.”

브릴랜드와 함께 전시회를 기획하며 정 관장은 자수를 하나의 학문으로 체계화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는다. 무엇보다 그에게 자극제가 된 것은 한 관람객이 동양의 자수품을 감상하며 “기계로 했을 것이다” 라고 비아냥 거리던 말이었다.

“화가 났어요. 아, 이거라도 얼른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조교로 일하고 있던 뉴욕대에서도 ‘자수문화는 아직 희귀한 거다. 왜 잘 알면서 책 안 내냐. 월급 더 주겠다’고 지속적으로 회유하고 있었고요.”

정 관장이 1979년에 출간한 ‘동양자수의 기술(The Art of Oriental Embroidery)’은 198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의해 ‘올해의 미술서적’ 으로 선정됐다. 책을 한 번 출간하니, 한 권의 책에서 담아내지 못한 자료들로 또 논문을 쓰게 됐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계속해서 또 다른 책을 쓰고 있었다고. 특히, 미국 전역의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찾아낸 한국의 활옷과 흉배를 분석해 2005년 출간한 ‘비단실(Silken Threads)’은 ‘표현예술’ 자수를 집대성한 서적이다.

“우리 활옷이 정말 아름다운데, 국내에 있는 건 보존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미국박물관에 숨어 있던 것들을 찾아냈는데, 서양학자들이 너무 모르는 거예요. 왜 소매에 봉황이 수놓아져 있는지, 저고리 부분은 왜 ‘복(福)’자가 덧대어져 있는지….”

이 책은 현재 미국 조지워싱턴대 교재로 쓰인다. 그만큼 정 관장의 연구 성과와 권위는 독보적이다.

“책 내고, 또 강의하러 다니고, 아이들 키우느라 바쁘게 살았어요. 메트로폴리탄 ‘올해의 책’ 선정이 한국인 최초라는 것도 수년이 지나서 누가 말해 줘서 알았죠.”

▶베니스를 헝겊으로 그리다…중국에서 울고, 이탈리아서 웃고 미국땅에서 당차게 제 갈길 가면서 ‘충청도 또순이’는 ‘한국 또순이’가 됐다. 하지만 정작 정 관장의 학창시절 별명은 눈물보였다.

“타국살이가 서럽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세계 곳곳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수 유물을 발견할 때마다 눈물이 터져나오곤 했죠. 중국 자수품은 엄청 화려하죠. 워낙 비단실이 넉넉한 ‘부자 나라’ 였잖아요. ‘자수 좀 안다’ 고 잘난 척한 게 창피해서 반성하며 울기도 했고, 우리 자수가 그에 비하면 너무 소박하고 남아 있는 것도 너무 적어서, 속상해 또 울었지요.”

한국 최고였고 일본 열도를 들끓게 했다. 여세를 몰아 바늘, 실 하나 들고 혈혈단신 미국땅을 밟은 정 관장이 정작 깊은 좌절감을 느낀 것은 인종차별도, 타국살이 설움도 아니었다. 다양한 자수품을 수집하기 위해 방문했던 중국에서였다.

“중국은 워낙 명주실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였고, 우리는 비싸게 주고 수입하거나 얻어 쓰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중국은 오늘날의 공장 같은 거대한 공방에서 수십, 수백명의 여성들이 대량생산을 했죠. 우린 적은 실로 조금밖에 만들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우리만의 기복적이고 소박하고 정겨운 자수 문양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생겨난 특징이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자수문화에 눈을 뜨고, 직접 체험하며 우물안 개구리를 벗어난 정 관장은 뉴욕대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던 1975년 이탈리아 교환학생 기회를 잡는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가장 꿈 같은 시절’ 이었다.

“해가 서서히 뜨기 시작하는 새벽 4시의 베니스를 본 적 있으세요? 너무 아름다워요. 과제용으로 제출하려고 베니스를 그리기 시작했죠. 그런데 오전 7~8시만 되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드는 거예요. 긴 검은 머리를 뒤로 동여매고 앉아서 그림을 그리면 지나가던 남자들이 와서 말을 걸죠. ‘그림 그리는 동양 여자’ 가 신기하기도 했겠지. 그리고 내가 그땐 좀 예뻤어요. 지금은 이래도 말이야.”(웃음)

한 학기에 작품 15점을 제출해야 하는데, 아침마다 ‘너 뭐 하니’ ‘데이트 할래?’ 하고 말붙이는 이탈리아 남자들 탓에 그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실과 헝겊을 다루는데 자신있던 정 관장은 제출 기한이 다가오자, 캔버스를 찢어버리고 천으로 베니스를 그리기 시작했다.

“ ‘패브릭 콘스트럭션(Fabric Construction)’ 이라고 멋대로 이름을 붙였지요. 천 쪼가리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으니까, ‘브라보(Bravo: 잘한다)!’ 하며 사람들이 또 모여들더군요. 동네 할머니들이 ‘우리 집에 있던 거야’ 하며 형형색색 자투리 천들을 갖고 와 응원해 줬어요. 그때 모은 헝겊이 아직도 뉴욕 산처럼 쌓여 있어….”

일본에서 ‘수를 놓아 성금을 기부한 최초의 여자’ 로 화제가 되더니, 이번엔 ‘천으로 베니스를 그린 최초의 여자’ 로 이탈리아 방송에도 출연했다. 그림 6점으로 베니스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헝겊 그림’으로 유명세를 타고, 학점을 받고, 무사히 학위도 딸 수 있었다.

▶평생 연구 업적을 고국 품에…자수박물관 개관과 설원재단의 설립 연구와 학업 그리고 양육을 병행하며 타국에서 40여년을 보낸 정 관장은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영구귀국은 아니지만, 평생의 자수 연구 업적을 전부 짊어지고 왔으니 정 관장의 모든 것이 온 셈이다.

“자수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문화였죠. 그래서 숙명여대에 기증했어요. 여자대학이기도 하고, 100여년 전 가정과를 중심으로 세워졌기 때문이죠.”

2004년 5월에 개관한 숙명여대 정영양 자수박물관은 정 관장이 유럽, 중국, 이란, 일본 등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자수 유물과 작품 6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뒷면이 자수로 묘사된 중국 춘추전국시대 청동거울부터 명ㆍ당나라 유물뿐만 아니라 정 장관이 1967년 일본전시회를 마친 후 청와대의 요청으로 제작한 자수 병풍도 두 점 있다. 이 작품의 원본은 현재 청와대가 소장하고 있으며, 박물관 전시본은 이후에 정 관장이 다시 만든 것들이다.

최근 이 박물관을 둘러본 중국 베이징 복장학원의 왕치 부교수는 “자수 유물이 넘쳐나는 중국이지만, 이렇게 체계적이고 교육적으로 전시된 곳은 없다” 며 놀라워했다.

올해로 개관 8년을 맞은 자수박물관은 뉴욕에 가족이 있는 정 관장이 자리를 자주 비우면서, 사실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정 관장 스스로 “소홀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2011년 자신의 호인 ‘설원(雪園)’을 따 설립한 설원재단을 통해 그는 해외에 한국자수를 알리는 일뿐만 아니라 국내 수공예인들을 위한 지원에도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세계 최고의 손재주와 기술을 가진 한국 명인들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전통 없는 문화란 없어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들이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럴려면 자수제품에 대한 수요와 시장형성이 급선무인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나 늘 고민해요. 설원재단 설립은 아주 작은 한 걸음일 뿐이죠.”박동미 기자/pdm@heraldm.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