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바람 부는 길(45)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거성의 재벌2세가 국제전화로 권도일과 통화하던 그 순간, 게릴라 레이싱은 장엄한 피날레를 장식하던 중이었다. 무려 3천만 달러를 상금으로 내건 거성으로서는 열 받을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뭐야? 전진후… 그 놈이 또 꼴찌를 했어? 등신 같은 놈. 1974년산 치타 이미지에 똥칠을 하는구먼. 그러기에 권도일 선수가 운전대를 놓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사흘 내내 VIP룸에서 레이싱을 지켜보던 거성의 재벌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의 아들인 2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아버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는 없지요. 이스라엘 Urban사와의 비밀계약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재벌2세는 아버지에게 조금도 지지 않고 말을 받았다. 그들의 태도로 보아 부자지간에 뭔가 뒤틀린 심사를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스라엘 회사에 배신당한 것이 내 잘못이란 말이냐? 게릴라 레이싱을 주최한 것 때문에 배신을 당했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하지만 게릴라 레이싱의 상금은 너무 과했습니다. 3천만 달러가 애들 장난입니까? 게다가 배신당하기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예요. 방송사, 신문사에 쏟아 부은 돈이 얼마인데 레이싱 기사는 겨우 쥐꼬리 만 하게 나왔으니…”
“시끄럽다. 그래서 너는 사방에 도청이나 당하고 있는 거야?”
이를테면 부자지간에 서로가 서로에게 분풀이를 하는 중이었다. 재벌이란 늘 이런 점이 문제다. 지는 태양과 떠오르는 태양… 비춰야 할 땅이 넓을수록 두 태양 간의 알력은 커지게 마련인 법이다.
거성도 다를 바 없었다. 사업을 키워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아버지는 더 이상의 실리보다는 명분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재벌2세는 허세와 다름없는 명분은 질색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동차 재벌로서의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중이었다. 재벌2세가 생각하는 의무란? 다름 아닌 신개념 자동차를 향한 연구 개발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 만만한가?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말이 있고, 날고 기는 놈엔 짱돌이 최고라는 말이 있다. 결코 떠오르는 태양과 지는 태양으로 단순하게 구분 지어질 만큼 세 다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말이다.
“회장님, 룸 밖에 손님들이 와 계십니다.”
전망유리 밖으로는 이제 막 포디엄에 오른 레이싱 우승자가 축하 샴페인을 터뜨리는 중이었다. 우승자가 어느 나라 선수이건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직 3천만 달러란 돈이 아까울 따름인데… 그때 비서진으로부터 전갈이 온 것이다.
“누구야? 언론사 분들인가?”
“명함 대신 이걸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왠지 분위기가… 청을 거역할 수 없을 만큼 강인한 느낌이었습니다, 회장님.”
“이리 줘 보게.”
거성 회장은 비서가 전하는 봉투를 받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긴장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너… 이 분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니? 이 분이 어째서 너를 만나자고 하지? 그리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북한에 다녀올 의향이 있냐고?”
봉투에는 대선주자로 지목되고 있는 높은 양반의 친서가 들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내용을 쭉 읽어보던 거성 회장은 뒷목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편지를 읽을 용기가 없었으므로 그 편지를 아들에게 넘겨야만 했다.
그 편지를 받아 든 재벌 2세의 안색도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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