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9회> 바람 부는 길 27

수십대의 머신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스키장을 달려 내려오는 모습은 기막혔다. 하지만 촬영감독의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비춰지는 게릴라 레이싱 장면은 더더욱 장관이었다. 밀었다가 당기고, 당겼다가 옆으로 흘리는 촬영기법, 이른바 ‘밀당’을 할 때마다 풍만한 C컵 가슴과 앙증맞은 A컵 가슴을 드러낸 처녀들이 화면 속에 교차되는 모습이란 한겨울의 스키장인지 뜨거운 여름 해수욕장인지 구별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나중에 스크린 처리를 하든 검은 테이프를 붙이든, 혹은 젖가슴이 그대로 신문 방송에 노출되어서 경을 치든 당장엔 알 바 아니었다. 촬영감독은 어쩌다 맞닥뜨린 대박 명장면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를 들이댄 채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밀당을 즐기고 있었다.

“도대체 저 여자들이 누구야? 누군데 대회를 망치려 드는 거야?”

VIP룸에서 복합화면으로 랠리 실황을 종합지휘하고 있던 재벌 2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공중파 라이브 방송이었다면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 방송사고가 벌어진 셈이다. 케이블방송이라 오히려 다행이었지만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게릴라 레이싱 자체를 망치는 두 여자를 그대로 두고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옆에 놓인 무전기를 통해 경기운영팀에 긴급 지시를 내렸다.

“지금 뭣들 합니까? 저 꼴이 안 보여요? 어서 스노모빌로 저것들을 끌어내세요!”

“지금은 스노모빌을 가동시킬 수 없습니다. 랠리머신과 충돌하면 아마 뼈도 못 추리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보고만 있으렵니까? 촬영감독에게 무전부터 때려봐요. 여자들 알몸 노출을 피해서 랠리 상황만 찍으라고 해요.”

“이미 그렇게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저 여자들이 촬영 포인트를 제대로 노렸더라고요. 퍼포먼스를 벌이는 자리가 카메라 앵글 한 중앙인 걸 어쩝니까? 말릴 시간도 없었습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저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거든요.”

“어허, 미치겠군. 쟤들 누굽니까? 돈을 바라고 저 짓들을 하는 거요? 뭐요.”

“하나는 유민 제련그룹의 회장 딸입니다. 또 하나는 유민 그룹 계열사에 소속된 골프선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 아래에서 부둥켜안고 뒹구는 사람들은 유민 회장의 부인과 그 아들이라고 합니다. 즉, 모두 유민 회장과 관련된 인물이죠.”

재벌 2세는 확대되어 드러나는 복합화면 속 인물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방금 들은대로 게릴라 레이싱이 펼쳐지는 슬로프 아래쪽에는 두 남녀가 부둥켜안은 채 이리저리 구르고 있었다. 폭주하는 랠리머신 틈새에서 구르는 모습이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언뜻 확대되어 잡힌 남자의 표정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는데…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엊그제까지 호크아이팀에서 재규어 XKR를 몰던 유호성 선수가 분명했다.

“유민 회장이 가족을 총동원해서 우리에게 보복을 하는군요.”

재벌 2세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며칠 전에 끝난 몬테카를로 랠리에 우리가 협찬을 하기로 했었지요. 하지만 이해를 따져본 끝에 우리는 직접 팀을 꾸려 경기에 나섰습니다. 유민 회장은 그 점이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남의 행사를 방해하는 건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유치하기도 하고요. 온 가족이 목숨 걸고 저렇게 나서는 모양을 보니 소름이 끼칠 지경입니다.”

“방금 게릴라 레이스 내리막 1차 경기가 끝났네요. 우리 거성의 전진후 선수가 3등으로 골인해서 승점 3점을 획득했습니다. 잠시 후에 오르막 1차 경기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실망스럽게도…폭발사고나 인명사고는 없었습니다.”

복합화면을 보면서 경기상황을 종합보고하던 직원은 큰 사고 없이 잘 끝난 내리막 경기를 실망스럽다고 전했다. 사실 재벌 2세는 그럴싸한 사고를 기대하고 있었다. 1974년 미국 그랑프리에서 사고를 당해 찢어진 가드레일에 목이 잘려나간 헬무스 쾨닉의 경우처럼 화끈한 사고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고? 이 대회의 목적이 기자의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비밀리에 추진하는 에어 뮬의 개발정보를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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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