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5회> 바람 부는 길 33

“회장님, 저는요… 싸구려 반지 따위로 여자 마음을 빼앗으려 드는 얼치기 치한들은 딱 질색이라니까요?”

“허허, 나도 그런 남자는 질색이라오. 나를 얼치기 치한으로 몰아붙이지 마세요. 도매금으로 넘기지 마시라고요.”

최영 장군을 닮은… 유민 회장은 이 말을 끝으로 어금니를 꽉 다물고야 말았다. 자칫하다가는 그녀에게 욕이라도 쏟아부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싸구려 반지? 날씨가 서늘했기에 망정이지 한여름 날씨였다면 즉시 양복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반지를 찾아 한강으로 뛰어들어야 마땅한… 고가의 다이아 반지를… 뭐가 어째? 싸구려?

“역시 회장님은 멋쟁이예요.”

양은혜는 입술에 침을 발라 억지 칭찬을 한 뒤에 유민 회장의 눈앞에 엄지손가락을 반짝 추켜세웠다. 하지만 그녀인들 2800만 원짜리 보석을 강물에 버렸는데… 속마음이 겉 표정만큼이나 편안했을까?

하긴 예나 지금이나… 허세 부리다가 쪽박 찬 사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도 일부 잘나가는 대감들은 현찰 대신 어음을 즐겨 사용하곤 했다. 특히 기생집에서 술이라도 거나하게 마신 후에는 백지를 펼쳐놓고 붓을 들어 일필휘지! 외상술값을 쓰고 낙관을 찍어주곤 했는데, 그 허세가 보통을 넘었다는 말이다. 양반들이 그렇게 어음을 발행할 때에 한몫 챙기려는 기생들은 방구석에 요강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어머나, 호탕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나리께서 겨우 술값 100냥이 뭡니까? 이까짓 돈을 받느니 차라리 거저 드렸다는 소릴 듣는 편이 났겠어요.”

대감이 금액을 적고 낙관을 찍을 때까지 얌전한 척 다소곳이 옆에 앉아 있던 기생은 그 어음을 받아들자마자 두 손으로 마구 구겨서 요강 속에 처넣고 탁! 소리가 나도록 요강 뚜껑을 닫았다고 한다. 대감께서는 점잖은 체면을 구길 수도 없고, 아녀자의 요강 뚜껑을 열어볼 수도 없고… 대략 난감한 상황에 다시 금액을 적는데, 모름지기 어음장에 두 배 정도의 금액을 다시 적어 넣었을 것이다. 최소한 갑절은 되어야 구겨진 체면을 다시 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허세 부리던 대감이 사라진 후의 풍경은 어땠을까? 미리 깨끗이 닦아 말려 놓은 요강 속에는 구겨진 어음 한 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겠지. 그 기생은 어깨춤을 추어가며 부리나케 다리미를 꺼내들었을 것이다. 쓱싹 다림질만 하고 나면 횡재하는 셈이라. 결국 두 장의 어음을 합산하면 애초에 받으려던 금액의 세 곱을 받은 셈이었다. 그러니 사내들이여, 예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도 어수룩한가?

유민 회장 앞에서 앙살을 떠는 양은혜의 심정은 어벙한 대감 앞에 미리 요강을 준비하고 술값을 뜯어내던 조선시대 기생과 다를 바 없었다. 좁쌀만 해도 명색이 다이아 반지인데 어찌 아깝지 않을까. 하지만 그걸 과감히 버려야 적어도 세 곱 이상의 다이아로 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진작 간파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회장님께서 진정으로 저를 원하시다니… 감격했어요.”

양은혜는 유민 회장의 팔을 젖가슴 안쪽으로 바짝 끌어안았다. 겉으로 보기엔 오래되어 농익은 애인처럼 여겨졌다.

“자고로 중년 남자의 사랑은 진실한 법이오. 어린애들처럼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꾸지는 않지요. 그러니 내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이아 반지를 강물에 던져버린 것은 큰 잘못이란 말입니다. 그게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던가요?”

“그것으로 회장님 사랑을 확인했으면 그만이지요. 더 이상 뭐가 아깝겠어요? 그까짓 반지야 회장님께서 다시 사주시면 되잖아요?”

이크! 공연히 쓸데없는 걸 물어봤군. 유민 회장은 짐짓 못 들은 체하며 킁킁 헛기침을 해대었다. 하지만 양은혜는 집요했다. 그녀는 유민 회장의 귀 언저리에 입을 바짝 붙이고는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민 회장은 얼떨결에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800억 원이 걸린 큰 도박이었음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귀에 달콤하기만 했다.

“더 큰 걸로 사주실 거지요?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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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