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바람 부는 길(17)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바로 그때, 어디선가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희영과 강준호는 본능처럼 저 멀리 슬로프 꼭대기에 도열해 있는 게릴라 레이싱 선수들의 모습부터 올려 보았다. 그들은 아직 자동차에 탑승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자동차 앞에 개미처럼 줄지어 서있는 그들의 모습은 멀리에서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다. 하긴 아직 레이싱 시작을 알리는 축포도 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어머나, 강유리… 우리 강유리 선수가!”

“내려와요? 어디에? 벗었어요?”

신희영은 기겁을 했는지 두 팔로 강준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야 말았다. 하지만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진 강준호 역시 제대로 서있기 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저기! 저 꼭대기에서 내려와요.”

“벗었냐고요. 토플리스?”

비록 조그맣게 속삭이는 말투였지만 둘 사이의 대화에는 긴장감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하긴 슬로프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강유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긴장하지 않을 재간도 없었다.

“미쳤어요. 오색 연막탄을 흩뿌리면서 내려오네요.”

“정말 그렇군요. 저 연막탄은 어디서 났을까? 빨강, 파랑, 노랑… 녹색, 하얀색… 어머나 지금 막 벗었어요. 저걸 어째!”

“토,토,토… 토플리스 차림이군! 내가 미친다, 미쳐.”

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유리는 알몸에 빨간색 비키니 한 장만 달랑 걸친 채로 유유히 슬로프를 미끄러져 내려오는 중이었다. 폴 대신에 반짝이는 은빛 골프채를 들고 갈 지(之)자를 그리며 천천히 활강하는 그녀의 모습은 하얀 꽃밭 위를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한 마리 호랑나비와 모습이 같았다.

“아아! 저걸 어째요, 강 프로님!”

“나도 몰라요, 이제는 어쩔 재간이 없어.”

아무도 밟지 않은 미지의 땅, 순수한 은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하얗게 펼쳐진 눈밭 슬로프에 빨간 비키니는 피 보다도 선명했다. 그토록 선명한 피 한 방울이 사선으로 나부끼며 고요히 활강하자 함성을 지르던 사람들조차 모두 침묵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침묵할 수 있을까. 마치 강유리 한 사람만을 위한듯한 순간이 영원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우와~ 우와~”

다시 우레처럼 함성이 터진 것은 그녀가 스키를 타고 내려오다가 브래지어를 벗어던진 순간이었다. 고요했던 호수에 갑자기 돌이 날아든 것처럼 분위기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갔다. 마침 산 위에 선수들과 함께 도열해 있던 방송사 카메라 감독 한 명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슬로프를 따라 활강하기 시작했다. 하긴 스키장 슬로프를 곤두박질치는 자동차보다야 토플리스 차림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미녀의 모습을 찍은들 무슨 죄가 되리.

“신 여사. 저길 봐요. 저건 또 무슨 짓이야?”

“프랑카드 잖아요? 뭐라고 썼어요?”

그녀의 뒤로 바람에 날리는 머플러처럼 길게 펼쳐져 나부끼는 것은 분명히 프랑카드였다. 이사도라 덩컨이 죽기 전에 머플러를 흩날렸다고 했던가?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 그녀야말로 머플러를 훨훨 바람결에 나부끼며 활강하는 가미가제 특공대였다.

‘경축! 강유리 선수, 타이거 우즈의 후계자로 선정!’

그녀가 휘날리는 프랑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