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소유하고 너는 나를 소유한다(Je te prends, tu me prends…)
가족 관계, 성관계, 대인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는 권력 쟁취를 위한 영원한 투쟁을 다양하게 드러낸 형태가 아닐까? 자신의 작품들을 골라 선집을 발간한 화가 안 반 데르 린덴(Anne Van Der Linden)의 눈에 폭력과 섹스는 너무나 밀접하게 서로 연결돼 있다. 안의 주장에 따르면 섹스의 뿌리는 바로 악이다.
뤼진 출판사가 출간한 이 기념비적인 저서에는 식인귀 여성들과 가학적인 남성들에게 똑같이 등을 돌리는 그림들이 등장한다. 확실한 쾌락을 내세우며 그들은 앞다퉈 서로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열락(悅樂)일까 아니면 가혹 행위일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선과 악을 넘어, 안 반 데르 빈덴은 배를 가른 향락적인 여성들, 일탈적인 형태의 열린 음부, 팽창한 내장을 그려내며 자신의 욕구를 발산하는 중이다.
“내 그림들을 본 후 나를 쓰레기 같은 여자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응, 너 바로 그걸 좋아하는구나!’, ‘음경을 빨아들여, 너를 바쁘게 만들어 줄 테니’라고 이야기해대지요. 그들에게 저는 ‘당연히 그래야죠’라고 응수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그때 나는 아직도 섹슈얼리티에 대한 금기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지요.”
안 반 데르 린덴은 섹슈얼리티에 대해 단테의 시각을 갖고 있다. 그녀의 그림 속에서 여성들은 남자들을 바비큐 그릴 위에 결박하거나 공원에서 줄을 지워 산책시킨다.그녀들은 한 손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다른 손으로는 남자들을 애무한다. “이 여성들은 내 모습과 유사합니다. 내 몸매와 거의 흡사하거든요.”라고 안은 주장한다.
반면 남자들은 친구들의 모습이다. 안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들에 대해서만 최악의 능욕을 겪게 한다. 남자들은 그걸 즐기는 분위기다. 수갑이 채워졌거나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도 그들의 음경은 발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성기 길이는 무려 1m에 달하기 조차 한다. 그림들은 페니스들에 의해 지배를 받는데, 그것들은 때때로 엉덩이에 박혀 있거나 어깨를 관통하는 양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더러운 안(Dirty Anne)’이라 부른다. 억압받는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녀가 이런 그림들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안은 오히려 자유로운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내가 잠자리를 같이 하려고 남자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을 흔쾌히 허락하셨어요. 반면 집안 여자들은 거대한 야수들이었습니다. (...) 인형들에 파묻혀 엉덩이를 주제로 내가 그림을 그리려면 남몰래 구석에 처박혀 작업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광녀(狂女)들로부터 매질을 당했거든요.”
17세 나이에 안은 부모가 살던 교외의 부르주아 지역을 떠나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던 예술가 코스트(Costes)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3개월 동안 인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그녀는 가구를 복원하는 일을 ?다. 보자르 미술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까운 교외지역에서 스콰트(squatt) 활동에 동참했다. 스콰트란 예술가들이 빈집을 무단 점거해 예술 공간으로 바꾸는 행위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면서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스콰트 활동은 아주 활발했지만, 동시에 아주 경직된 정치적 성향을 강요했어요. 살아남기 위해 도둑질을 해야 했어요. 무정부주의자를 흉내 낸 엉터리 짓거리를 저질러야 했거든요.
정부가 주는 수당 혹은 부모가 보내주는 수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고백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성격장애아들도 있었죠.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경찰이 개입하면서 끝장이 났지요.
한편에는 소녀들, 다른 한편에는 소년들과 함께 나는 24시간 동안 철창에 갇혀 있었습니다. 테러를 일삼던 극좌단체 ‘악시옹 디렉트’가 활동하던 시대였어요. 그 후 나는 집에서 폭력과 섹스를 다룬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해묵은 강박관념을 다시 끄집어 내면서 말이죠. 이야기를 꺼낼 필요를 느끼는 동시에 나 자신을 비워내는 방법이었거든요.”
안은 자신이 받은 모든 상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상은 지배욕과 폭력성이었다. 그림들 속에서 마초들과 남자 같은 여자들은 그로테스크한 허수아비로 등장한다. 안은 폭력을 구사하는 자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안은 그들을 마치 인형들처럼 조작해댄다.
“이 모든 것이 시늉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내 그림들은 내가 인형들과 나누던 이야기들과 닮아있습니다. 정말 천진난만한 쾌락이지요. 게다가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난 유아기 시절의 감각, 다형도착자(多形倒錯者)의 놀이를 되찾고 싶습니다.”라고 안은 부르짖는다.
그녀의 작품은 억압에서의 해방을 겨냥한다. 고대 조각들로부터 영감을 얻고, 이미지들의 결합을 통해 작업하면서 안은 섹슈얼리티 속에서 모호하게 작동하는 잠재적인 폭력을 밝혀내고자 애쓴다. 폭력은 바로 소유욕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욕구를 꽃에 대한 사랑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고 싶어 한다. 허나 그 욕구는 우리를 사자, 사슴 혹은 원숭이와 진지하게 비교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배 전략이 작동하고, 두목 타이틀을 위한 투쟁이 벌어진다. 내 정액이 승리자가 될 것이며, 내가 아닌 그 누구도 너를 임신시킬 수 없다. 심지어 영장류중에서 가장 평화로운 존재라는 보노보 원숭이 조차 집단으로부터 오는 모든 기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성행위를 한다. 서비스하는 성이자, 생존을 위한 성이다. 네가 나에게 주었듯이, 나 역시 내 자신을 네게 주는 것이다.
안은 명료한 눈으로 이 모든 것을 관찰한다. 보복의 감정이나 복수에 대한 생각은 전적으로 배제된다. 폭력에 관한 한 그 누구도 무구하지 않다. 사실 그건 대수롭지 않다. 폭력을 정리하고, 변모시키며, 승화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예술과 성의 역할이 요구된다. 맛깔스러운 닭고기 스튜 코코뱅 요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창자에 손을 대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글=아녜스 지아르(佛칼럼니스트), 번역=이상빈(문학박사ㆍ불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