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 끝까지, 죽을 때까지 (48)

글 채 희 문 | 그림 유현숙

라라 파비안느 (La La Favian), 기차는 떠나고 (Ce Train sen Va), 알렌느 (Helene), 떠나지 마 (Ten Va Pas), 엘자 (Elsa)… 불후의 명곡으로 일컬어지는 프랑스 샹송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비록 운동선수이긴 하지만 강유리는 그런 샹송들을 늘 허밍으로 따라 부르곤 하던 낭만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녀에 비하면 백광돌은 돌부처나 다름없었다. 불어라면 그저 코맹맹이 소리로만 알고 있던 그가 강유리와 정서를 공유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불성설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 카지노가 그렇게 좋다던데… 한 번 당겨보지 않을래? 돈 좀 딴 뒤에 술이나 진탕 마시고 놀까?”

백광돌은 이렇게 얼버무리려 했다. 처량하게 바닷물이나 바라보면서 죽치고 앉아 코맹맹이 노래나 듣자는 강유리의 말이 반갑게 들릴 리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아까운 시간을 버리느니 차라리 침대로 가자… 는 말이 입 속에서 뱅뱅 맴돌고 있었다.

“샹송을 들으면서 마음을 먼저 녹여야지요. 그래야 몸도 따라서 녹을 거 아니겠어요?”

“마음을 녹이고, 몸도 녹여?”

“마음이 녹고, 몸이 녹아야 오빠의 허기진 영혼을 채워줄 수 있잖아요.”

어허! 이럴 수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는 없었지만 백광돌은 제풀에 입이 함박처럼 벌어지고야 말았다. 오빠라고 불러주기만 해도 손발이 먼저 오그라들곤 했는데, 뭐? 허기진 영혼을 채워 주겠다고?

어차피 시작된 고민이었지만 이번엔 그녀가 기름을 들이 붓고 있었다. 무슨 고민이냐고? 불타는 열정과 사나이로서의 의리,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이 바로 고민 아니고 무엇이랴. 불타는 열정이란, 유리만 보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사랑의 감정이었고 사나이로서의 의리란, 선배 강준호의 심사를 거슬리지 않으려는 냉정함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건드리고는 싶은데 선배의 딸이기 때문에 참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을? 강유리와의 상열지사를!

“그럼… 그러지 뭐.”

기름을 들이 부었으니 어찌 불붙지 않으랴. 백광돌은 마음부터 녹이기 위해 호텔 리셉션에 당장 콜택시부터 신청했다. 이제부터 강유리가 하자는 대로 따라하고 가자는 대로 따라가 볼 예정이었다.

강유리가 콜택시를 멈춰 세운 곳은 ‘부엔디아 엘알티’, 발음하기도 어려운 간판을 단 클럽이었다. 몬테카를로의 호텔이나 음식점들은 대부분 바다를 향해 훤히 트여있었지만 남녀가 섞여 진하게 춤추는 클럽마저도 바다 쪽으로 훤히 트여있을 줄은 몰랐다. 100평 남짓한 공간에 대략 500명쯤이나 될까? 그 많은 수의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춤을 추고 있었다. 자칫하면 조난당한 유람선의 승객들처럼 우르르 바다로 빠져들 것만 같았다.

“어쩌면 한 결 같이 실크 드레스에 노브라 차림이로군.”

백광돌의 눈에는 춤추는 여자들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뭐, 사내들이란…

“자, 여기선 부둥켜안고 상체만 흔드는 거예요. 스텝은 밟으면 안 되고요.”

아, 바다를 보면서 험한 파도를 연상하는가? 혹은 지난여름, 그 험한 파도 위에 와 닿던 뜨거운 태양빛을 연상하는가. 그 많은 남녀들은 파도를 연상하면서, 혹은 뜨거운 태양을 떠올리면서 느리게… 느리게 상체를 흔들고 있었다. 물론 백광돌도 강유리를 납싹 끌어안은 채 천천히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미칠 노릇이었다. 고요하게 몸을 흔드는 것이 이리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격정적일 줄이야. 빨래판 같은 그의 가슴에 물씬 와 닿는 강유리의 젖가슴이, 그 감촉이… 그대로… 알몸인 것처럼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아니, 어째서 가슴이 쿵쿵 뛰는 걸까?”

20대 시절, 첫사랑을 나누던 그 시절처럼 백광돌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가만히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었을 뿐인데도 팔의 안쪽 핏줄을 따라 그녀의 펄펄 뛰는 맥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기도 했다. 아, 정말로 마음이 녹기 시작하는 구나… 그런데 이건 또 뭘까? 그 노곤한 순간에 유독 지겟작대기에는 점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으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