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민상식 기자] 지난 2010년 여름 어느날 새벽 1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싸와디캅 봄뺀 아사사막 미아라이 추어이 캅?(안녕하세요. 저는 자원봉사자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신 선생님이시죠? 저는 경기 평택경찰서 김 형사입니다.”
평택시에 위치한 모 공장에서 일하던 한 태국 여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 형사는 수사 중 통역이 필요해, 태국어 통역 봉사자인 신병근(49) 씨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태국여성의 몸에서 멍자국이 발견됐어요. 사망한 여성과 친하게 지내던 태국여성이 있는데, 이 여성에게 평소 한인 고용주와 남자친구의 폭행이 있었는지 물어봐 주세요.”
잠시 뒤 한 태국여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신 씨에게 말을 건넸다. 신 씨는 이 여성과 15분간 태국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김 형사님. 사망한 태국여성이 평소에 고용주와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한 적은 없다고 하네요.”
신 씨는 사망한 여성에게 폭행이 없었다는 내용을 김 형사에게 전달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에 모르는 번호가 뜨면 항상 태국어로 인사를 건네요. 도움을 필요로 하는 태국인이 언제 저에게 전화할지 모르니까요.”
10년째 태국어 통역봉사를 하고 있는 신 씨. 그의 직업은 태권도장 관장이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15일 신 씨를 만나기 위해 찾은 그의 태권도장은 수업을 받는 아이들로 시끌벅적했다.
인터뷰를 위해 태권도장 한 켠에 있는 조그만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벽에는 10여개의 자격증과 표창장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무실 문이 연신 삐걱거리며 열렸다. 수업을 받으러 온 아이들이 한 두명씩 신 씨에게 배꼽인사를 했고, 신 씨는 인터뷰 도중에도 아이들 한명 한명 일일이 눈을 맞춰 인사를 했다.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의 신 씨. 하지만 태권도복을 입는 순간 그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한다. 태권도 공인 7단. 자신의 머리 꼭대기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그의 발 뒤꿈치를 보고 있자면, 조금 전 온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는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 졸업 후 회사원, 경찰, 대학강사, 태국 청소년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를 거쳤다. 그중 태국 오지마을에서의 태권도 자원봉사 3년, 한국으로 온 뒤 이어진 태국어 통역봉사자 10년을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신 씨 인생의 절반을 태권도가 지탱했다면 나머지 절반은 태국이라는 나라가 이끌었다.
▶태국어 사투리 쓰는 언어봉사자=태국 수도 방콕에서 기차로 4시간. 신 씨가 태권도봉사를 했던 시골 마을 뜨랑은 태국 남부 오지에 위치해 있다.
이 곳에서 3년을 살다보니 신 씨는 자연스레 태국어 남부 사투리를 채득했다. 때문에 신 씨의 태국말을 처음 듣는 태국인들은 웃음부터 터트린다. 구수하게 부산 사투리를 쓰는 로버트 할리(한국명 하일)를 우리가 신기하게 느끼는 것처럼 태국인들도 그에게 관심을 보인다.
“태국 남부지역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태국어 사투리를 배웠어요. 그래서 제가 태국 사투리로 발음하면 태국 사람들이 많이 웃어요. 가볍게 대화하면 태국 남부 현지인으로 착각할 정도예요.”
1998년 태권도 봉사를 위해 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해도 신 씨는 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하지만 3년동안 태국에 살며 먹는 것, 자는 것 등 생존을 위해 태국어를 공부했다.
“한 달동안 현지 적응하느냐고 힘들었어요. 고열에 시달리는 등 태국의 뜨거운 공기까지도 싫었죠. 하지만 한 달이 지나니까 서서히 적응을 잘 했습니다.”
3년간의 태권도 봉사 뒤 2002년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우연히 언어봉사단체 BBB코리아(BBB KOREA)를 알게 돼 언어봉사를 시작했다. 2002년에 신 씨가 봉사를 시작했을 무렵 bbb언어봉사자 중 태국어 봉사자는 10명가량 이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와 달리 태국어는 봉사자가 적어요. 그래서 매일 하루 한통씩 태국어 통역전화를 받아요. 통화는 짧으면 2~5분. 길면 30분이 넘기도 하죠.”
신 씨는 연간 300여통, 10년간 3000통이 넘는 통역전화를 받았다. “태국 특성상 주로 결혼이주여성이나 근로자의 생활 통역 요청이 많은 편이예요.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연도 많죠. 얼마 전 한국으로 시집 온 지 일주일 밖에 안 된 어린 신부가 경찰서를 찾아왔어요. 이 여성은 매일 이어지는 남편의 구타로 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죠. 태국인이 잘못한 경우도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태국인에 야박하게 굴 때도 많아요.”
▶모든 것을 버리고 태국 오지 마을에서 봉사=대학 졸업 후 2년동안 경찰로 근무했던 신 씨는 1994년에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입학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이어 대학원 졸업 뒤 1996년 인천전문대 사회체육학과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강사 생활을 하면서 경기 시흥시에 태권도장을 차렸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태권도장이 무척 잘 됐죠. 당시 태권도 붐이 일었던 때라 1년도 안돼 학생이 100명이 넘었습니다.”
모든 게 잘 돼가던 이때 신 씨는 우연히 TV에서 한국국제협력단(KOICAㆍ코이카) 해외봉사 단원모집 광고를 봤다.
“가고 싶었어요.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태권도장이 번창하는 등 모든 게 잘 돌아가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 다닐때부터 해외봉사를 하고 싶었거든요.”
곧바로 코이카 해외봉사 단원 태권도 부문에 신청을 했다. 시험과 면접을 보고 합격통보를 받은 뒤 해외봉사 3개월 교육을 받았다. 이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잘 나가는 태권도장 등 모든 것을 뒤로 한채 1998년 태국으로 떠났다.
신 씨는 홀로 태국 남부지역 소도시 뜨랑의 위체인마투 중ㆍ고등학교(전교생 약 2400명)에서 태권도를 가르쳤다.
“태국에 간 뒤 한국 정부에서 주는 봉사비 월 28만원으로 살았어요. 집은 태국정부에서 매월 4000바트(약 12만원)를 지원해주는 돈으로 저렴한 곳을 직접 구했죠. 물론 봉사를 한 3년간 태국아이들 간식, 합숙비용 등으로 제 개인돈을 더 썼어요.”
태국에서의 태권도 인기는 생각보다 놀라웠다. 태국 중ㆍ고등학교의 경우 아이들이 직접 원하는 체육수업을 고르는데, 무에타이 수업을 10명이 고른다면 신 씨의 태권도 수업에는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몰렸다. 이에 자신감을 가진 신 씨는 직접 태권도부를 만들었다.
“태국 사람들은 저를 ‘아잔 신(신 선생님)’으로 불렀어요. 학교에서 학생들이 아잔 신으로 부르니까 다른 태국인들도 다들 저를 아잔 신으로 부르더라구요.”
▶사무원…경찰…결국은 태권도 사나이=신 씨는 1964년 경북 김천에서 3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가 과수원을 운영해 경제적으로 여유있게 자랐다.
“제가 초등학교때 키가 제일 큰 편이었어요.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가자 친구들이 키가 자라고 덩치가 저보다 커졌어요. 위기감을 느껴 태권도를 시작하게 됐죠.”
신 씨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1980년. 때마침 그가 입학한 고등학교에 태권도부가 만들어졌다. 운동 잘하는 아이들 위주로 뽑혔는데 신 씨는 오랜기간 태권도를 했다는 이유로 1학년때부터 태권도부 주장을 맡았다.
“학창시절에 운동만 한 것은 아니예요. 고등학교 때 후회없이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일부러 공부 잘하는 친구들만 사귀었을 정도였죠. 특히 제2외국어인 일본어를 영어보다 열심히 했습니다. 막연히 일본어가 재미있었어요.”
1993년 용인대(당시 대한유도대학) 태권도학과에 입학 뒤에도 공부에 대한 욕심은 끊이지 않았다.
“학교 생활하면서 수영도 재밌고 테니스도 관심있고 해서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어요. 하나씩 따다보니 자연스럽게 자격증이 많아져 현재 생활체육지도자 1급 자격증 등 12개 자격증을 갖고 있어요. 한 번은 유도 과목에서 성적이 ‘B+’가 나와 장학금을 못 받게 돼 교수실을 찾아가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한 적이 있어요. 교수실에서 매트를 깔고 다시 낙법시범을 해 ‘A’ 학점을 받아냈죠.”
1985년 군에 입대한 신 씨는 논산훈련소에서 보안사로 착출돼 강원 화천시 15사단 보안부대에서 근무했다. 그의 임무는 보안파트 타자병. 하루종일 타자를 치는 일이었다.
“서울 보안사령관에게 보내는 자료를 산에서 밤새도록 타자를 쳤어요. 군생활 30개월 중 28개월을 타자병으로 지냈더니 어느새 ‘타자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죠.”
사실 신 씨가 대학시절 꿈 꾸던 일은 청와대 경호실 근무였다. 하지만 두 번이나 시험에 낙방한 뒤 1987년 일반기업에 취직해 사무직으로 일했다.
“일반 회사원은 운동을 하던 저에게 맞는 일이 아니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1991년 경찰이 됐죠. 서울 신월동 제4기동대에서 2년간 수십번에 걸쳐 시위진압을 다녔어요. 하지만 이 일도 저에게 맞지 않았어요. 경찰청 태권도시범단으로 일하던 토ㆍ일요일만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태권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해 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이기는 것보다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신 씨는 태국에서 자신이 만든 태권도부를 통해 아이들을 데리고 현지 대회를 많이 다녔다. 2000년 9월 방콕에서 열린 태국전국체전에는 남부지역 대표팀 태권도 코치로 16명의 선수와 출전했다.
“편파 판정이 너무 심했어요. 거의 매 경기 시합장에 뛰어들어가 ‘이건 아니지 않는가! 비디오판정을 해라’라고 항의를 했어요. 계속 항의하니까 태국 방송사 C3 등에서 저를 인터뷰 했어요. 제 모습이 태국 전국각지로 방송됐어요. 다른 지역에 있는 코이카 단원과 제가 근무하던 태국 학교선생님들도 TV에서 제 모습을 보고 저에게 잘 했다며 많은 격려의 말씀을 해줬어요.”
그는 특히 항상 제자들에게 정정당당히 승부하라고 가르쳤다. 2000년 태국전국체전 태권도 결승전에서 약한 상대를 만나 소극적으로 경기해 우승한 제자를 크게 나무라기도 했다. 신 씨는 그 제자에게 우승한 것보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제가 가르친 아이 중에 빠띠왓이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어느 상대를 만나든 최선을 다하는 그런 아이였죠. 결국 이 아이가 스무살이던 2005년 터키 이즈미르에서 열린 제23회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태권도 라이트급 우승을 했죠. 빠띠왓은 대회 우승 직후 태국공항에서 한 방송사와 인터뷰를 했어요. ‘어디서 태권도를 배웠냐’는 태국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아잔 신(신 선생님)’에게 배웠습니다’라고 말해 저를 뭉클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죠.”
신 씨는 아이들에게 예의의 중요함도 강조했다. 그는 태국 뜨랑의 위체인마투 중ㆍ고등학교 방학때마다 태국 람캄행 대학교에서 태권도 지도사범을 했다.
“아이들에게 항상 예의가 중요하다고 가르쳤어요. 람캄행 학생들은 지도가 끝나면 매점에 가서 물을 사와 제 것부터 먼저 챙겼어요. 인사 잘하고 예의가 바른 아이들. 아무리 제가 고생스럽게 가르쳐도 전혀 아깝지가 않았어요.”
그는 언젠가 다시 외국에서 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태국어 통역 봉사를 앞으로 계속 할 생각이예요. 또 나중에 여건이 되면 다시 태국봉사를 가고 싶어요. 정말 순수하고 착한 아이들과 함께하면 저 역시 삶의 행복함을 느끼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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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안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