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영상ㆍ서지혜 기자]#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시대가 있었다. 칠흙같은 어둠의 시대. 군주들은 전쟁으로 여념이 없고, 탐관오리는 극성하고, 아사(餓死)하는 수 만의 백성을 돌봐줄 사람은 없는 무질서와 탐욕의 시대. 그때 한 줄기 영웅의 빛이 출현한다. 언제부터인가 강호에 등장한 그는 욕심에 찌든 고수들을 하나하나 격파하더니 강호를 평정한다. 그가 지나가는 길엔 탐관오리는 용납될 수 없고, 굶어죽는 백성도 없다. 무당, 개방, 곤륜, 화산 등 숱한 명문도 그에겐 무릎을 꿇는다. 불사신공(不死神功)의 영웅은마침내 만인에 칭송 받는다. 한줄기 영웅의 빛은 찬란한 햇살을 뿜으며 만물은 평정을 되찾는다.
무협지나 무협만화 서문(序文)에 단골손님 격으로 등장하는 내용.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영웅을 그리워하는 민초(民草)들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다.
강호영웅(江湖英雄). 그를 그리워하고, 그가 되고 싶은 것은 무협지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복잡하고, 말 많고, 바쁘고, 스트레스 지수가 매일매일 확확 오르는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무림시대에 살았던 예전 사람들보다 더 강호영웅 출현을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의 능력을 믿는 이라면, 본인도 강호영웅이 될 수 있다는 뿌듯함을 더욱 느끼고 싶어할 지 모른다. 그렇지만 무림 최고수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데 많은 이들은 절망감을 안고 산다.
그렇지만 실망은 말라. 강호영웅이 될 수 있는 길은 있다. 그중 하나가 사이버 바둑 세상이다. 오늘날 무림의 격전지는 사이버로 이동했다. 바둑 전문사이트인 타이젬과 오로 화면 안에는 영웅을 꿈꾸는 이들이 넘치고 넘친다. 타이젬족(族), 오로족의 꿈은 절대강자다. 무림에서 천검(天劍)과 도룡검(屠龍劍)으로 상대방을 추풍낙엽처럼 베어버리며 절대신공자로 우뚝 서듯이, 사이버세상에서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검과 오묘한 축지법으로 적들을 제압하는 반상신공(盤上神功)의 주인공 말이다.
반상의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일반 바둑 마니아 뿐은 아니다. 아마추어 강자나 프로 바둑기사도 똑같은 심경이다. 초절정 고수는 이들의 로망이다. 절대강자가 되기 위한 줄은 끝이 없다. 오로 사이트의 동시 접속자는 1만5000여명에 이른다.
왜 그럴까. 영웅에 대한 갈망은 보상 심리다. 일상에 대한 피곤함, 주변 환경에 대한 불안감을 씻고 세상을 평정할 꿈에 부풀어 있는 상태, 그 자체에 대한 즐거움이다.
바둑 마니아이자 아마 강자인 노희지 전통놀이보존회 회장은 “사이버에 있다보면 잡념이 사라져 좋다. 바둑은 머리를 쓴다고는 하지만 머리가 식혀지는 두뇌스포츠”라며 “스트레스를 말끔히 해소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라고 말한다.
사이버 세상에선 승률 관리가 최대 관심사다. 상대방 장풍에 나가 떨어지는 대신 쓰러뜨림으로써 승전보를 차곡차곡 쌓는 것, 그것은 가장 큰 희열이다.
사이버 세상에선 ‘전설’이 넘쳐난다. 얘기만 들어도 솔깃할 정도의 전설들. 한때 타이젬에서 화제가 됐던 고수가 있었다. ID ‘외톨이’. 당시 프로기사 이세돌이 한국에서 랭킹 1위를 지키던 중 휴직을 선언했다. 그때 등장한 이가 외톨이다. 외톨이는 금세 타이젬 바둑을 평정했다. 당시 그의 바둑 스타일은 이세돌과 매우 비슷했다. 사람들 사이에 외톨이가 이세돌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같은 소문이 난 이유는 실제 프로바둑 기사 고수들도 자주 사이버세상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세상에서 잠시 하강해 온라인 방에 들어선 입신(入神)들도 나오다보니 일반 마니아로선 흥분을 감출 수 없는 곳이 바로 사이버 대국실이다. 운이 좋아 프로와 대국을 펼칠 수 있다면, 이 기보는 평생 가보로 남길 정도의 영광이다.
이러다보니 사이버 방에 매일 출근(?)하는 이들도 많다. 직장인 김명대(가명ㆍ52) 씨가 그렇다. 어느날 술 한잔 하자는 동료를 뿌리치고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오늘은 사이버오로에서도 가장 유명한 ID ‘우스꽝’의 대회가 있는 날. 1년에 총 12번 열리는 대회에서 6번의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의 실력자다. 한 번 우승했을 때 상금이 500만원 정도 되니 온라인 아마추어 바둑업계에서 그는 이미 프로바둑기사와 마찬가지다. 오늘은 중국인 선수와의 대전이 있다. 빅매치가 있는 날은 동시에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온라인에 접속한다. 다행히 서버 폭주는 없다. B씨는 베팅을 시작한다. 당연히 우리의 고수 우스꽝에게 걸었다. 그간 모은 게임 포인트는 전혀 아깝지 않다. 김 씨는 “고수들의 대국을 보면 마치 무협영화에서 초절정 강자들의 무술 대결을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며 “내가 응원하는 이가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어 일상의 잡념은 끼어들 틈이 없다”고 했다. 그는 “현재 개인적으로도 승률이 58%인데, 올 한해는 70%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최대 목표”라고 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아슬아슬함, 나도 실수하지만 상대방도 실수하면서 반상에 흐르는 물고 물리는 숨막히는 긴장감, 묘수를 던질때의 짜릿함과 흥분. 이같은 사이버 전투족의 획득물이다. 사이버에 너무 빠져 일상의 질서를깨뜨리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건전한 타이젬족이나 오로족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