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4회> 붉은 태양을 따라서 (33)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즐거웠던 그날이 올수 있다면 아련히 떠오르는 과거로 돌아가서, 지금의 내 심정을 전해보련만 아무리 뉘우쳐도 과거는 흘러갔다~’
까마득한 날에 우리 가요계를 휘저은 ‘여운’의 노래, 하지만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잘생긴 영화배우 장동건이 ‘해운대’라는 영화에서 취침시간에 부른 노래 정도로만 기억할 것이다. 애절한 모습으로 노래 부르던 가수 여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삼삼하기만 한데… 모두들 까마득히 잊고 있는 모양이니 과거는 흘러가면 진정으로 끝인 모양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날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이건 박인환 시인의 그 유명한 ‘세월이 가면’의 첫 구절이다. 똑같이 과거를 회상하며 안타까워하지만, 시인이건 가수건 흘러간 사랑을 잊지 못하는 심정이 애절할 뿐인데… 유독 강유리만은 흘러간 사랑에 발목을 잡힐까봐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유민그룹의 황태자 유호성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대못 치듯이 제 가슴에 땅땅 뚜드려 박았으니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을 줄만 알았던 것이다. 까짓 아버지 강준호와 유민그룹의 마나님 신희영과의 관계쯤이야 팔 걷고 나서서 청산할 수 있을 것이란 배짱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 유민 회장과 몽고여행을 다녀온 과거사가 치명적인 독버섯처럼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자라나고 있었으니… 이걸 어쩐담?
‘이걸 어쩌지? 헛소문이라고 우길 수도 없고…’
그녀의 머릿속으로는 유민 회장과 함께 몽고 울란바토르에서부터 남쪽 준모도 지방으로 말 타고 달리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는 중이었다.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초원에 유목민들의 천막인 게르 하나를 빌려놓고 밤새워 목욕하던 장면은 어찌 그리도 생생히 떠오르던지… 조랑말 안장에 허벅지가 쏠려 사타구니가 거덜 난 채로 껄떡대던 유민 회장의 표정은 어찌 그리도 기억에 또렷한지…
‘그날… 유민 회장이 제 꾀에 속길 망정이지. 찬물 뒤집어쓰고 동태처럼 얼어붙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 했어.’
그녀는 스스로 질문하고 제풀에 답변하기를 반복했다. 이를테면 혼자서 마음을 달래는 중이었던 것이다. 하긴 둘이 여행을 다녀오긴 했어도 혼자 목욕하고 혼자 잤으니 굳이 외도라고 볼 수는 없었다. 강유리와 찰떡처럼 붙어 잠자기 위해 일부러 난로를 고장 낸 유민 회장에게 차라리 감사를 표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래, 몽고여행은 공무상 어쩔 수 없는 여행이라고 우기면 그뿐이야. 정작 고민은… 벤츠 승용차 사건이지…’
그러고 보니 강유리와 유민 회장과의 상열지사는 몽고여행 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유민 회장의 세컨드 집무실 주차장에서 벌어졌던 일은… 아아! 차마 기억하기도 끔찍한 일이 아니었던가.
‘괜찮아, 그날도 역시 아무 일 없었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양 옆으로 흔들며 과거를 털어버리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다고 잊혀 질 까닭이 있나? 고백하건대 그날 밤, 유민 회장과 강유리는 세컨드 집무실 주차장에 메르세데스 벤츠를 세워놓고 소위 카섹스를 시도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거사 직전에 경비원에게 들켰으니 망정이지…
기억해 보건대 그날, 경비원이 차 속으로 플래시를 비추었을 때… 유민 회장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머리에 그녀의 삼각팬티를 뒤집어쓰고야 말았다. 할로윈 축제도 아니고, 가면무도회장도 아닌 곳에서 팬티를 뒤집어 쓴 유민 회장의 모습이 얼마나 황당했는지…
‘비록 속옷은 벗었지만 어두운 골목, 깜깜한 자동차 속이었으니까 괜찮겠지? 아무렴… 괜찮을 거야.’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길 수차례. 연극대본을 외우는 것도 아니면서 독백을 읊어대는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촉촉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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