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도 부담스러운 성범죄 판결

피해자 진술 신빙성 가리기 어려워 4심·5심 있다면 다시 뒤집힐수도 피해자 조사 땐 2차피해 우려 단어 하나도 신경쓰며 노심초사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이 터진 지 3주가 지났지만, 당사자들의 엇갈리는 진술 속에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피해 인턴 여성과 윤 전 대변인의 진술에 따라 윤 전 대변인의 혐의는 경범죄가 될 수도, 중범죄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대개의 성범죄 사건이 그렇듯 당사자 간의 진실 공방은 사건 현장을 밀실로 만들어 놓는다. 성추문 검사 사건이나, 연예인 고영욱과 박시후 성폭행 의혹 등 최근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사건들의 진행 과정에서 일었던 공방들이 그렇다. 성범죄의 특성상 사건 현장에는 가해자로 의심받는 이와 피해자라 주장하는 이만 있었던 경우가 많다.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당사자의 입에 주로 의존해 사건의 의미를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판사들은 당사자의 진술이 진실한지를 고민한다. 문제는 고민의 결과가 언제나 같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지난해 5월 태권도장을 운영하던 A 씨는 성폭행범으로 징역을 살 뻔한 상황을 겨우 모면했다. 대법원에서 A 씨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판결했기 때문이다. A 씨는 2010년 자신이 운영하는 태권도장에 다니던 정신지체 3급의 10대 청소년을 강제로 성폭행하려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에 신빙성이 의심된다”며 무죄를 선고했지만, 항소심의 판단은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지능이 낮아 기억이 온전할 수 없을 경우 진술이 세부적으로 다르더라도 신빙성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며 피해자 진술이 진실하다고 보아 A 씨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이 항소심 재판은 당시 영화 ‘도가니’로 장애인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높아지던 시점에서 나온 것이어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적극 인정한 사례로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상고심에서 피해자 진술에 대한 판단은 또 한번 뒤집어졌다. 상고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한 점, 과거 거짓말을 한 이유로 태권도장에서 쫓겨난 적이 있어 나쁜 감정을 품고 허위 진술했을 가능성이 있는 점 등을 들어 항소심 판결을 파기했다. 반대로 무죄를 선고받았다가 유죄로 전환된 사례도 있다. 이혼 후 외동딸을 친척집에 맡긴 B 씨는 이따금 딸을 찾아가 성폭행을 한 혐의로 지난해 10월 재판에 넘겨졌다. 1심 재판부는 딸이 불 꺼진 방에서 아버지가 사용한 피임기구의 색상과 모양을 정확히 식별한 점이나 B 씨의 범행 시기 등과 관련한 딸의 진술이 번복된 점을 들어 딸의 주장을 의심했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서 어른한테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피해자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 연극을 했다”고 결론내렸다. 하지만 이 판결은 피해 시점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친족 간 성폭행의 특성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꼽은 ‘걸림돌 판결’로 선정됐고,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범행 시점을 정확히 모른다고 해서 신빙성을 부인할 수 없다. 피해자의 진술 태도로 미뤄 도저히 연극을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B 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물론 이 판결 역시 상고심에서 뒤집혀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성범죄 판결의 어려움은 통계로도 증명된다. 서울고등법원 김상준 부장판사의 논문인 ‘무죄 판결과 법관의 사실 인정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12년 8월까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무죄로 뒤집어진 강력사건 540건 가운데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문제가 된 경우는 266건이다. 이 가운데 성폭력 범죄는 무려 240건이나 됐다. 이쯤되면 무엇이 진실인지 아리송해지는 순간이 온다. 4심이나 5심이 있었다면 다시 뒤집어지는 판결도 있을 것이다.

판사나 검사는 제대로 사실을 밝히기 위해 피해자에게 같은 내용을 집요하게 묻고 또 묻지만, 그 역시 쉽지만은 않다. ‘2차 피해’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지난달 서울의 한 법원에서 주의력결핍 장애를 앓고 있는 아동 성폭력 피해자를 장시간 신문하며 적당한 배려를 하지 않아 논란이 됐던 것이 대표적이다. 한 법원 관계자는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를 향한 단어 하나, 어투 하나가 상처가 될까 노심초사해야 한다”며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진술조력인 제도나 법률조력인 제도는 어찌보면 심리를 충실히 진행해야 하는 판사를 위한 제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의 심각성이 환기되고, 성범죄를 엄하게 처벌할 것을 바라는 여론의 요구가 높아지면서 관련 사건을 담당하는 판사들에게 가해지는 심리적 부담도 늘었다. 관련법과 양형기준 개정으로 훌쩍 높아진 성범죄 형량 역시 사건을 다시 한 번 검토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쏟아지는 성범죄 사건들 저마다의 진실 공방 속에서 판사들의 고민은 늘어만 간다.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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