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3> 감추어진 승부 (27) 글 채희문 | 그림 현경희
머물기가 너무도 힘든 곳이어서, 아니 지나치기도 힘든 곳이라서, 신라의 고승 혜초마저도 눈물을 흘렸다는 중국의 변방. 하지만 어찌 된 까닭인지 지금 이곳, 란저우 근방으로는 여러 나라에서 숱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도형철이 란저우에서 이복동생 도종호 상무와 거성의 재벌 2세를 만나기로 했으니 그들 셋은 물론이고, 당장 눈앞의 강유리를 비롯하여 클래식 카 동호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지 않은가. 그런가 하면 북한 사진작가 예원희, 로열골드를 모는 권도일, 그가 달리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려는 권일주와 유한솜, 1974년 식 치타를 모는 유호성과 현성애, 기타 등등 수많은 집행위원들…
그뿐인가? 호색한이란 낙인이 찍힌 강준호와 그를 팀장으로 모시는 소위 유호성 케어 팀원들, CF를 찍기 위한 3류 감독과 촬영스텝들, 유민 회장이 파견한 천재 비서, 중국 통 비서, 매체담당 비서, 전 세계에서 모여든 랠리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들, 하다못해 북서 아프리카 모리타니아의 군인들과 N-Dos 특공대원에 이르기까지…
클래식 카의 퍼레이드를 따라오다 보니 웬걸, 그들의 목적지 역시 랠리 팀이 1박을 하는 란저우 근방 ‘류자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류자샤는 사방에 돌병풍을 두른 것 같은 천혜의 협곡이었다. 그 협곡 안에 수천 자루의 횃불을 밝혀놓고 랠리 선수들이 묵어갈 수 있는 포스트를 조성해 놓았다는 말이다.
도형철은 그 협곡 안에 위구르 식으로 텐트를 쳐놓은 휴게소에서 이복동생 도종호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도종호의 옆에는 그림자처럼 거성의 재벌 2세가 따라붙어 있었다.
“아니, 당신은… 토플리스 차림으로 골프를 쳤던 광고모델 아닌가요?”
“네, 맞아요. 모델이기 이전에 프로 골프선수지요.”
“워낙 유명해진 광고 덕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성함이 율리아나 강이시죠? 실례지만 본명은 어떻게 됩니까?”
도형철과 도종호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 이제 막 부둥켜안으려는 참에 텐트 휘장을 젖히며 강유리가 등장했던 것인데… 의외의 불청객으로 인해 상봉의 극적인 순간이 머쓱해지고야 말았다. 그 머쓱한 상황에 재벌 2세가 수인사를 청했던 것이다.
“아, 제가 알고 있습네다. 남조선에서 유명하다는 꼴푸선수… 강유리 양 아닙네까? 지난번 평양에서 열린 전 세계 여자 프로꼴푸 겨울대회에 참가하신 적이 있디요?”
“네, 그것도 맞아요. 그런데… 선생님께선 북한에서 오셨나 봐요?”
아차, 그렇구나. 공연히 사투리를 쓰며 나대었구나… 도형철은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거성그룹의 후계자와 은밀히 사업하는 자리에서 정체가 드러나고 말았으니 이걸 어찌해야 좋을까.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 하필이면 그 순간에 북한의 사진작가 예원희가 텐트 휘장을 열고 들어섰던 것인데…, 사진작가이기 이전에 그녀는 도형철의 수양딸 아니었던가. 뿐만 아니라 지난겨울, 전 세계 여자 프로골프 대회기간 동안 강유리 선수의 캐디 역할을 하던 유호성을 꼬여내어 함께 지낸 장본인 아니었던가.
“사진작가 님, 우리… 평양에서 마주친 적 있죠?”
“글쎄요… 기억이…”
예원희가 얼굴을 붉히는 중에 결국 상황을 수습하고 나선 이는 도종호 상무였다. 따지고 보면 그는 모든 사람의 정체와 입장을 속속들이 아는 처지였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어차피 함께 만나야 할 사람들이 모였으니 오죽 좋습니까? 내친 김에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우리의 공통적인 숙원사업을 풀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공통적인 숙원사업?”
“남과 북에서 동시에 골프바람을 일으켜보자는 것이지요.”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고… 도종호 상무는 즉석에서 합의점을 도출해 내기 시작했다.
<계속>
mee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