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서도 권력층만 타는 벤츠를 굴렸다 주위의 만류에도 남한행을 택했다 탈북 가수서 베트남 홈쇼핑 사업까지 그의 인생은 한편의 다큐멘터리였다 북한에선 청소년 스케이트 국가대표 거쳐 평양국립교향악단 바리톤 솔로가수, 중앙당 간부까지 엘리트 코스 거쳤죠 공산주의 오래 못갈것이라는 생각에 남한행 결심…9개국 거쳐 스위스서 망명…北국적 여권 갖고 귀순한 사람은 내가 유일 냉면집 ‘모란각’ 망했다고요? 식자재 유통 위해 체인점 모두 없앴더니 그렇게 소문나…지금은 일산 본점과 美 오렌지카운티점만 운영 베트남 2위 홈쇼핑 HSV 지분 참여 내 인생의 로또 당첨…매달 7%씩 성장 ‘개미가 수박 굴리는’ 신화 쓰고 있는 중…
후폭풍은 예상했다. ‘그곳’은 그런 체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마이크를 잡고 TV 카메라 앞에서 미소 지으며 노래한 건 이율배반의 극치였다. 어머니ㆍ형ㆍ누나가 차례로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식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 이상이었다. 끌려갔다는 건 곧 죽음을 뜻했다. ‘이곳’ 신촌의 27평(89.1㎡)짜리 빌라는 또 다른 상처의 공간이었다. 정착금으로 마련한 집이지만, 후회로 점철된 인생을 살 것만 같은 두려움을 떨치기 힘들었다. ‘탈북자’라는 꼬리표도 평생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더 쏟을 눈물이 없을 정도로 울었다. 낮엔 웃음을 팔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와선 곡(哭)을 했다.
궁상맞게 살 사람이 아니었다. 북에서도 권력층만 타는 벤츠를 굴렸다. 주위의 만류에도 남한행을 택했다. 녹록지 않았다. ‘탈북자’ 출신 가수로, 냉면집 ‘모란각’ 사장으로 인식됐다. 딱 거기까지다. ‘모란각’ 사업이 망해 종적을 감췄다는 소문에도 시달렸다. 2000년대 들어선 딱히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그렇게 잊혀진 인물이었다.
김용(54). 그를 경기도 일산에서 만났다. 안색이 좋았다. 노란 빛이 도는 염색에 파마머리가 잘 어울렸다. 양복 맵시도 호리호리한 체격을 잘 살렸다. 저음의 목소리. 말만 하지 않는다면 탈북자인 줄 알아채기 힘들다. 억양은 DNA와 같은 것일까. 귀순(1991년)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북한 말투는 남아 있었다.
베트남에서 홈쇼핑 사업을 한다고 해서 마련한 인터뷰 자리다. 전엔 미처 몰랐다. 그가 북한에서 스피드스케이팅 청소년 국가대표를 했고, 평양국립교향악단 바리톤 솔로가수였으며, 중앙당 간부까지 지냈단 걸. 남한에 와선 대중가수, 냉면집 사장, 유통회사 대표를 한 경력까지 있다. 여기에 홈쇼핑까지 더하면 김용은 ‘인생 7막’을 살고 있는 셈이다. 듣는 입장에선 스펙터클했다. 모든 이의 인생이 드라마겠지만 김용이 헤쳐나온 길은 말 그대로 다큐멘터리였다.
5시간 마라톤 인터뷰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부침(浮沈)이 심했고, 변화무쌍한 삶이 김용을 따라다녔다. 그는 자신을 ‘시험재배 텃밭’이라고 했다. 북한에서 온 김용이라는 ‘종자(種子)’가 남한에 뿌려져 얼마나 잘살 수 있는가를 해외 언론이 먼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 ‘종자’는 이제 베트남에서 과실을 딸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욕심 많은 북한 엘리트의 탈북기=이미 알려진 게 많지만, 그의 성장기ㆍ탈북과정 등을 직접 듣고 싶었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가 미래를 지배하기도 하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김용은 그 굴레에 어떻게 순응하고 대처했는지 알아야 했다.
1991년 10월 귀순했다. 스위스로 망명을 한 뒤 한국을 택한 것이다. 스위스. 북한의 보통사람과 다른 삶의 궤적이었을 것이란 점을 짐작하게 하는 단어다. 통상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을 통해 귀순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는 것과 차이가 많다. 그는 “부모님을 비롯해 집안 신분이 대대로 좋았다”고 했다. 김용이 탈북하기 전 작고한 아버지는 당 간부였고, 매형은 김일성 고급당학교 간부인 조직비서였다. 자강도 강계의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다. 양봉이 300봉 정도였고, 양도 50~60마리 정도 키웠다.
김용은 욕심이 많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싶은 욕구가 꿈틀댔다. 시작은 운동선수였다. 12살에 자강도 실업체육단에 들어갔다. 스케이트(5000ㆍ1만m) 청소년 국가대표 선수로 7년을 뛰었다. 10년 터울의 친형과 함께 선수생활을 했다.
김용은 고민 끝에 스케이트화를 벗었다. 그는 “형님이 사는 모습을 봤는데, 밤낮으로 고생하지만 잘살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김정일예술대학 2ㆍ16전문대에 들어갔다”고 했다. 죽기 살기로 노래를 배웠다. 2ㆍ16전문대를 최고학점으로 졸업해야만 발탁된다는 평양국립교향악단에 바리톤 솔로가수로 스카우트됐다. 3년 뒤엔 김책공업대 기업경영과에 입학했다. 가수의 길을 버리고 미련 없이 공부를 하기로 한 것. 이후 시쳇말로 ‘끗발’ 있게 살고 싶어 중앙당 면접시험을 봤다. 산 자와 죽은 자의 12촌까지 캐는 철저한 과거ㆍ사상 검증을 통과해 해외자금을 북한에 대는 중앙당 산하 105호실 책임지도원이 됐다. 러시아,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 현지인과 회사를 만들고 동고동락하며 지냈다. 그는 “중앙당에서 일할 땐 벤츠를 타고 제가 선수 생활을 했던 중앙선수촌에 가면 동료들이 ‘야, 김용이 성공했구나’ 말할 정도였다”고 했다.
문득 남한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공산주의는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봐서다. 당시 러시아 마피아 멤버였던 김용의 친구는 극구 말리며 러시아로 올 것을 권했지만 김용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체코에 머물다가 9개국을 거쳐 스위스에 도착해 망명했다. 이제까지 북한 국적의 사람이 여권을 갖고 귀순한 건 김용이 유일하다.
▶북에서 바람에 날아온 ‘인간의 장난감’, 풍파에 맞서다=인터뷰 중 그는 점심을 먹고 하자고 했다. 사무실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모란각’으로 향했다. ‘모란각’은 그에게 사업가로서의 첫 길을 열어준 보배 같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상처를 안기기도 했다. 망했다는 소문 때문이다. 그는 “현재는 ‘모란각’ 체인점을 모두 없앴어요. 제 판단에 따라 체인점 재계약을 일괄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일산 본점과 미국 오렌지카운티점만 있습니다. 냉면 등 식자재 유통을 위해서 체인점 사업을 접은 겁니다. 이 때문에 김용의 ‘모란각’이 망했다는 소문이 난 거죠”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96개까지 늘어났던 ‘모란각’이 하루아침에 간판을 바꿔달았다. 그는 “여기 일산 본점만 해도 하루에 손님이 1000명 정도 온다”고 강조했다. 김용은 ‘모란각’으로 돈을 꽤 만졌다. 회사의 총 매출이 연 340억~360억원에 달했기에 가능했다. 일산과 부산에 공장도 갖고 있고, 공장 1곳당 120억~14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고도 했다.
2003년, 냉면ㆍ만두 등 식자재를 유통하는 모란봉물산이라는 회사도 만들었다. 홈쇼핑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는 냉면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김용은 “모란봉물산의 냉면이 올해 국내 6개 홈쇼핑에서 1위를 했습니다. 7번 방송해서 5번이 매진됐죠. 방송 한 번에 11만~13만인분 정도 판매됩니다”라고 했다.
냉면 사업을 시작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남한으로 귀순한 게 운명이었다면, 냉면은 그에게 예비된 사업 아이템이었다. 남한에서 가수로 나선 초창기, 그는 방송국 PDㆍ기자들에게 밥을 많이 얻어먹었다. 밥값을 낼 돈이 없어서였다. 남들은 방송 잘 나온다고 했지만 귀순 뒤 2년간 외국인 대우를 받아 출연료의 30~35%가 세금으로 나갔다. 큰마음 먹고 지인들을 신촌의 빌라로 초대했다. 가수 노사연 씨 등이 찾아왔다. 김용은 1주일 전부터 김치 2~3종류, 반찬 10가지 정도를 준비했다. 직접 뽑은 면을 활용한 냉면도 포함돼 있었다. 호평이 쏟아졌다. 한 PD는 냉면 사업을 해보라고 조언했다.
요리는 자신이 있었다. “북한에서 운동할 때 저는 막내였기 때문에 항상 요리사 할아버지를 도우며 요리를 배웠어요. 여름에 냉면을 만들면 직접 면 뽑는 것부터 육수 내는 법까지 모든 것을 익혔습니다. 할아버지가 언제 고기를 빼면 고기가 맛있고, 육수가 맛있는지를 다 알려주셨어요.”
사업자금 마련이 문제였다. 무작정 신한은행 무교동지점을 찾았다. 당시 지점장인 이재우 현 신한카드 사장이 대출이 안 된다고 했다. 보증인이 필요했기 때문. 그는 “북한에서 내려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사정했죠. 딱하게 여긴 이 지점장의 도움으로 결국 5000만원을 빌릴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일산 장항동에 중고테이블 7개를 마련해 장사를 시작했다. 사채도 7500만원을 빌렸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파리 날리기를 거듭하자 빚은 8개월만에 1억5000만원까지 불었다.
명색이 가수ㆍ방송인이었지만 전파의 힘을 빌리긴 싫었다. 김용은 “방송에선 창피해서 장사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움이 안 됐어요. 저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야간업소 행사를 뛰지 않았습니다. 북한에 부끄럽게 소문이 날까봐였죠. 중앙당 간부까지 하던 김용이 생계를 위해 밤업소까지 나간다고 알려지면 돈을 벌지라도 남한과 제 망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전하던 김용은 결과적으론 방송의 힘으로 고비를 넘겼다. KBS ‘6시 내고향’에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탔고, 사업이 번창해 사채 빚을 1년7개월 만에 청산할 수 있었다.
‘탈북 가수’ 김용으로서의 생활도 궁금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많이 협조해줬다. 귀순자 관리를 1년간 안기부를 통해 받은 뒤엔 경찰청 정보보안과가 김용을 담당했다. 그는 “경찰에서 2명이 지원 나왔었죠. 메이크업 코디와 매니저 대행을 해줬어요”라고 했다. 북한에서 가수를 했었다고 귀순 기자회견 때 밝히는 바람에 ‘탈북 가수’로 활동했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방송할 때 동료들이 놀리는 것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바람에 날려온 이북의 장난감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북한에 남겨둔 가족들의 비보를 접하고는 주저앉고 싶었다. 김용은 “제가 귀순한 뒤 형은 훈련 도중에 수용소로 끌려갔고, 어머니도 그렇고 누나는 7년 뒤 수용소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누나의 아들은 김정일호위국에 있었는데 강제 전역당하고 수용소로 끌려가자마자 숟가락을 삼키고 자결했고, 어머니도 6년 만에 영양실조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가족을 죽인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나라의 체제가 나쁜 것이지 그곳에 사는 사람은 잘못이 없는 게 아니냐고 했다.
그의 사무실 책상 뒤엔 앳된 모습의 교복을 입고 있는 소녀 사진이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주저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아무 의미 없는 사진입니다. 누님입니다. 13년 차이가 나는 누나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울렁였다. 피의 대가로 얻은 인생이어서 허투루 살 수 없었다고 했다.
▶베트남에서의 홈쇼핑 사업, ‘인생 로또’에 당첨되다=화제를 베트남 홈쇼핑 쪽으로 돌렸다. 그는 ‘개미가 수박을 굴리는’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홈쇼핑 사업을 표현했다. 어차피 방송으론 최고가 될 수 없을 걸로 판단하고 배낭 하나 들고 사업 아이템을 찾아 베트남으로 떠났다. 그는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볼지를 생각했습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서 도전한다는 인식을 주기 위해 베트남을 택했습니다”라고 했다. 2009년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 무한한 가능성을 봤다고도 했다.
홈쇼핑 업체를 운영하게 된 건 인복(人福)이 8할 이상 차지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처음엔 식당을 운영하려다 베트남의 소스 등을 국내에 들여오는 사업을 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현지에서 10년 이상 거주한 한인의 도움을 받아 HSV의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이 회장은 국내 유력 대기업의 대표이사를 지낸 인물. 이 회장은 김용에게 HSV의 주주로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제안했다.
김용은 “꿈 같은 일이지만, 회장께서 HSV 지분 52%를 넘겨줬습니다. 북한에서의 경력, 홈쇼핑 사업의 경력을 인정한 거죠. 지난해엔 모 대기업이 갖고 있는 HSV의 지분 29%마저 인수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HSV는 베트남 호찌민에 본사가 있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건물에 직원 80여명이 일한다.
HSV는 현지 홈쇼핑 업계 2위를 달리고 있다.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1위 CJ홈쇼핑과 격차가 많이 벌어져 있지만 김용은 전망을 밝게 보고 있었다. 그는 “매달 7%씩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홈쇼핑은 채널 싸움이죠. 지난 5월, 한국으로 치면 KT와 같은 베트남 채널과 계약을 맺고 지난달부터 방송을 시작했어요. 또 곧 베트남 전역으로 방송되는 케이블채널에서 HSV를 볼 수 있게 됩니다”라고 했다. HSV는 2015년까지 매출 3000억원이 목표다.
사실 HSV 인수에 큰 공을 들였다. 한국에서 번 돈 가운데 매달 수십만달러씩 베트남에 투자했다. 인터뷰를 하는 이유도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김용은 “대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아요. 자금이 필요할 때 대주지 못하면, 자식이 공부하고 싶다는데 시켜주지 못하는 가난한 아버지가 된 기분이 듭니다. 대기업과 경쟁하는 저를 보고 중견기업이 많이 와서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대기업만 참여하는 홈쇼핑 사업에서 제조ㆍ유통 구분 없이 중소기업이 뭉쳐 같이 가자는 겁니다. (베트남 홈쇼핑 업계에서) 1위를 하는 회사도 대기업, 3ㆍ4위로 쫓아오는 회사(GS샵, 롯데홈쇼핑을 의미)도 대기업이지만 열심히 뛸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용은 HSV를 베트남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베트남엔 일본 기업 2만여개, 한국 기업 4000여개가 진출해 있다. 곧 한국보다 더 큰 시장이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홈쇼핑, 택배 사업에 이어 카탈로그, 모바일 등의 사업도 준비 중이다.
김용은 경영의 첫째 신조로 신뢰를 꼽았다. 기존 HSV의 회장이 자신에게 지분을 넘긴 것도 믿음이 바탕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했다. 이를 두고 자신은 인생의 로또를 맞았다고 표현했다. 김용은 ‘모란각’이 번창할 때 탈북자들에게 금전적으로 큰 도움을 줬다. 그 과정에서 돈을 떼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는 “저는 누굴 미워하지 않아요. 내 돈을 떼어먹은 사람, 감사를 모르는 사람, 거짓말한 사람을 모두 미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들을 욕하면 속된 말로 ‘돈 잃고 바보 되는’ 것이죠. 돈을 잃어도 사람을 챙기면 돈만 잃게 됩니다. 언젠간 그 사람도 뉘우칠 것이고, 제게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했다.
김용은 덧붙였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탈북자들을 돕지 않는다고. 이유는 ‘모란각’ 단골손님 중 한 분이 “바닥이 보이는 물에서 인심을 써봐야 더 크지도 못하고 많이 주지도 못한다. 바닥이 보이지 않도록 사업을 키운 다음에 도와줘라”라고 조언을 했기 때문이다.
귀순한 이후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고 자부하는 김용은 사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팁 하나를 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말했다. “제 회사는 절대로 여자가 나오는 술집과 골프장에서 비즈니스를 하지 않습니다. 금지입니다. 파트너가 원하더라도 정중히 거절하는 편이에요. 대신 사무실, 커피숍에서 맨정신에 농담을 하며 친해집니다. 처음부터 술로 비즈니스를 하면 습관이 돼 계속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정말 신세를 졌다면 술 대신 그 사람의 직책, 성격에 맞는 선물을 나중에 줍니다.”
글=홍성원 기자/hongi@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김용이 살아온 길>
1960.05.17. 평안북도 강계 출생 1971~1978년 자강도체육단 소속 빙상선수(1972년부터 7년 동안 청소년국가대표) 1979~1982년 김정일예술대학 성악과 입학 및 졸업 1982~1984년 3년 동안 테너 가수로 활동 1984~1987년 김책공업대학 기업경영학과 다니면서 중앙당 입당, 중앙당에서 일하면서 대학 졸업 1985~1991년 중앙당 보조지도원, 지도원, 책임지도원 1991년 귀순 1992년 1집 앨범 ‘아, 평양아’ 발표 1996년 외식업체 ‘모란각’ 창업 1997년 외식 프랜차이즈 기업 ‘모란각’ 설립 2000년 저축의 날 국무총리표창 2003년 ㈜모란봉물산 설립 2011년 서울대 식품영양산업 CEO과정 수료 2011년 베트남 홈쇼핑(HSV) 인수 2012년 캄보디아 홈쇼핑(HSC) 설립 2011년~현재 한아홈쇼핑 회장, 대표이사
hongi@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