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슬기 기자] 추석입니다. 백화점, 대형마트, 시장은 명절준비를 서두르는 이들로 붐빕니다. 저마다 선물세트며 과일, 고기 같은 먹거리를 손에 들고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따듯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만족감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긴 연휴,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함께 정을 나눌 가족들. 그런 소소한 기쁨들이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들이 속으로는 울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슬픈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며칠 전 후배에게서 듣게 된 한마디 때문입니다.
명절을 앞두고, 공업고등학교에서 기계 선반ㆍ밀링을 전공하고 나와 한 작은 공장에서 파견직원으로 일을 하고 있는 후배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산업부에서 중견ㆍ중소기업을 담당하며 ‘○○그룹, 협력업체에 추석 자금 수천억 푼다’ 같은 기사를 종종 봐왔던 터라 “그래도 이번 추석은 상여금 받아서 고향에 내려가면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다”는 말을 툭 내뱉었습니다.
후배 녀석은 그저 한숨만 쉬었습니다. “일하는 곳이 워낙 작은 공장이라 추석 보너스도 없고 통장사정도 넉넉지 않은데, 길고 긴 추석 부모님께 아들 노릇을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니 걱정”이라더군요.
얼어붙은 경기에 여러 대기업이나 단체들이 ‘추석 자금 대방출’에 나섰지만 구석구석 모든 곳까지 온기가 미치기에는 역부족인 모양이었습니다. 실제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 50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 10명 중 6명(66.1%)이 ‘이번 추석에 명절 보너스를 받지 못한다’고 답했다더군요.
그는 또 “평소 알고 지내는 동료나 친구 중에는 추석 차례상을 차릴 비용과 부모님 용돈,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대부업체에 소액대출을 받는 사람이 꽤 있다”며 “본인도 소액대출을 받아 효자 노릇 한번 해볼까 생각 중”이라고 속내를 털어놨습니다.
일단은 “그래도 대부업체까지 찾아 명절을 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많이는 못 빌려줘도 몇십만원은 빌려줄 테니 그만두라”고 후배를 말렸습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앉아있는데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또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솟아올랐습니다. ‘정말 명절 때문에 소액대출을 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을까?‘
급한 대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검색창에 ‘명절 비용’, ‘추석 비용 소액대출’ 등의 단어 따위를 마구 집어넣어 보았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조카들 용돈도 줘야 하고 제사비, 부모님 용돈까지…제 월급으론 도저히 충당되지 않을 것 같아서 소액대출을 받으려고 합니다. 소액대출 저금리인 곳 좀 알려주세요.”
“이번에 취직을 했는데 회사 사정이 어려워 추석 보너스가 없다네요. 부모님 실망시켜드리고싶지 않은데 100만원 정도만 빌릴 곳 없을까요?”
지식나눔게시판, 블로그, 카페 등지에 ‘추석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소액대출을 원한다’는 글과 광고들이 수백 건이나 올라와 있었습니다.
기자라는 신분을 숨기고 ‘명절비용 소액대출’을 해준다는 한 대부업체에 슬쩍 전화를 걸어보니 “설이며 추석마다 명절 나기 비용을 마련하려고 전화하는 사람이 꽤 된다”며 “무보증ㆍ무담보에 연 최저 12%에서 최고 29.9% 금리에, 연체금리 최저 25%에서 39%”라는 설명이 익숙한 듯 술술 나옵니다. 100만원에서 1000만원까지 원하는 대로 빌려줄 수 있답니다. 정말, 당장 부모님 드릴 용돈조차 마련할 수 없어 귀성길이 두려운 이들에게는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명섭 기자 msiron@ 추석 연휴를 앞두고 8일 오전 많은 시민들이 출국을 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에 따르면 추석 당일인 12일을 전후해 인천공항 이용객은 총 51만5723명으로, 지난해 추석에 비해 14.9% 증가할 것으로 조사됐다. 추석 전후 5일간 인천공항 이용객이 50만명을 넘어서는 것은 처음이다. 김명섭 기자 msiron@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갤럭시노트2나 갤럭시S4 등의 스마트폰을 맡기면 연 30%~40%대의 금리로 수십만원을 빌려준다는 ‘신종 전당포’도 성황이었습니다. 이른바 ‘IT전당포’라 불리는 곳입니다. 지난 주말 한 IT전당포에 갤럭시노트2를 맡기고 40만원을 빌렸다는 A 씨는 “신용등급 걱정 없이 명절비용을 마련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마저도 왠지 안쓰럽더군요.
사실 명절 때마다 전통시장상인이나 소상공인들을 상대로 한 ‘소액대출피해’는 늘 있었던 일입니다. 대부업체가 대목을 맞아 손님들에게 팔 물건을 대량으로 들여놓기 위한 자금을 소상공인들에게 고금리 사채로 빌려주고, 폭력ㆍ협박 등을 동원해 불법채권추심을 하는 범죄 말이죠. 그래서 명절이면 늘 ‘추석 대목 소상공인 상대 불법대부업 집중 단속’ 같은 신문기사가 나오고는 합니다.
하지만 소액대출이 이제 ‘장사할 물건을 사기 위한 상인들’이 아니라 ‘부모님 선물을 사려는 일반인’들에게 까지 넓게 퍼져있다니, 반갑기만 하던 추석이 왠지 조금은 미워졌습니다.
인터넷 뱅킹으로 저에게 30만원을 빌린 후배 녀석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추석이 지나면 꼭 한번 만나 소주 한잔 하자”고 다짐을 합니다. “그래, 그래" 대답을 하던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가올 설은 후배가 조금은 더 따듯하게 맞이할 수 있을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 저는 이번 추석만큼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추석, 너 밉다. 다음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번 같지만 마라” 전화를 끊고 달을 보다가 이렇게 빌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