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1>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2) 글 채희문 | 그림 현경희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송신설비라 하더라도 기지국이 없는 고비사막 한 복판에서는 겨우 텔렉스 역할을 하는 구식설비 대용으로 밖에 쓰일 수 없었다. 무선으로 직접 연결해서 아버지 강준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그러나 강유리는 벅찬 심정으로… 강준호에게 텔렉스를 타전하기 위해 또박또박 타이프 자판을 눌렀다.
텔렉스는 영어로 타전해야만 했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영어공부 좀 해둘 것을… 그녀는 통신기 앞에서 머리를 벅벅 긁다가 가까스로 ‘be going to~’ 라는 숙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학창시절 영어시간에 종아리를 맞아가며 외운 단어 ‘be going to~ 는 ’~할 예정이다’로 번역할 수 있었다.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하지.
‘Papa! Ho Sung is golng to golf player! Don’t worry, Be happy!’
말이 되든 말든… 물론 뒤에는 노래가사를 옮겨 적었을 뿐이지만 급히 꾸며낸 문장치고는 너무나 훌륭해서 스스로 감격할 지경이었다. 육성으로 대화를 할 수만 있었다면 그녀는 클래식 카 동호회 회장이면서 세계적인 갑부 움라우트 패튼이 자기에게 청혼했다는 사실부터 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방끈이 짧으니 그 말은 나중에 직접 만나서 전할 생각이었다.
“이거 봐요, 감독님. 유호성이가 골프선수와 함께 어딜 갔다는 겁니까? 우리 딸내미가 영어로 편질 보내왔는데 통 뭔 소린지…”
“앗따, 따님께서 영어에 꽤나 능통하군요. 하긴 세계적인 골프선수가 되려면 영어를 잘 해야지. 박세리, 신지애… 이런 선수들도 기자회견 때 보면 영어를 엄청 잘 하더라고요. 요즘 애들 참 대단해요.”
“글쎄 이게 뭔 소리냐니깐?”
“빨리 가야된다는 말 아닙니까? Go가 들어 있잖아요. Go. 레디 고!”
“골프선수한테 가야 한다고? 내 딸이 골프선수인데?”
“그러니까 빨리 따님한테 가라는 말입니다.”
“그런 소리였군.”
단순하게도 강준호는 그 즉시 딸에게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강유리가 영어로 편지까지 써서 보냈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강유리는 유호성을 따라다니며 유혹하는 중일 테니 유호성의 거처부터 파악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희영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동파만신원에서 사고를 친 이후에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무슨 염치로 전화를 거나…
“여보세요? 어머나… 강 프로님!”
그러나 뜻밖에도 신희영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녀야말로 라싸의 썬라이즈 호텔에서 유호성이 딴 여자와 놀아나는 것을 보고는 잔뜩 풀이 죽어있던 터였다. 아들을 애먼 여자에게 빼앗겼다는 허탈감에 빠져있을 때, 그나마 얘기가 통할만한 강준호의 전화를 받았으니 그 아니 기쁠까.
“지금 유호성 군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 전화했소. 호성이가 아직도 랠리 운전수 노릇을 하고 있으니 큰 걱정이오. 내가 직접 찾아가서 말려야겠단 말이지.”
“그래요, 역시 강 프로님밖엔 없네. 그 녀석 오늘 밤에 단둥 근방에 있는 제 4포스트에서 쉴 거래요. 나도 오늘 단둥 4포스트로 갈 거예요. 우리 거기에서 만나요.”
신희영과 통화를 마친 강준호는 서둘러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트렁크 속의 짐은 단출했지만 골프백이 거추장스러웠다. 하긴… 골프도 어쩌다 쳐야 재미있지, 눈 뜨면 필드로 나가서 어두워질 때까지 공만 두드리다보니 이젠 골프채만 봐도 이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집에 가고 싶어도 여권에 ‘호색한’이란 도장이 시뻘겋게 찍혔으니 공항 출입국관리소를 어떻게 빠져나가? 염병!”
그는 짐을 꾸리면서 애꿎은 3류 감독에게 짜증을 부렸다. 다행히 중국 국내선 비행기를 탈 때엔 도장이 찍히지 않은 여권 맨 앞장만 보여주면 된다는 게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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