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본문 등에 ‘제재’ 표현
대부분 증권사들 모두 혼용
정부 “대법 판결 대한 보복”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한일 양국 간 무역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경제 전문가들이 작성하는 대다수 증권사 보고서가 이를 ‘제재’로 표현하고 있다. 현재 상황은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도발로 피해를 보고 있지만, 그 원인을 우리 정부가 제공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헤럴드경제가 24일 최근 증권사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일본의 반도체 수출 규제 조치에 대해 상당수가 한국에 대한 ‘제재’로 표현하고 있다.
현대차증권이나 NH투자증권, 신한금융투자 등은 보고서 등의 제목으로 제재를 사용했다. SK증권이나 KB증권, 이베스트투자증권 등은 보고서 내에서 ‘일본 제재 영향 분석’이나 ‘일본의 대한국 무역제재’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제목에서 본문으로 범위를 확대하면 사실상 대부분 증권사가 ‘제재’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제목에서는 규제로 표현하고도 본문이나 소제목에서 제재로 표현한 경우도 있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제재’는 ‘일정한 규칙이나 관습의 위반에 대하여 제한하거나 금지함. 또는 그런 조치’라는 뜻이다. 잘못을 행한 상대에 대한 조치다. 이번 사태를 제재로 표현한다면 한국이 국제 규범을 어겼기 때문에 일본이 수출 제한 조치를 내렸다는 의미가 된다.
제목에 제재 표현을 사용한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개별 단어의 뜻을 일일이 살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면서 “앞으로는 맥락에 맞는 정확한 단어를 선택하도록 유의하겠다”고 전했다.
정부 차원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표현으로 어떤 단어를 쓸 것인지 공식적으로 정리된 적은 없다. 다만 일본 정부의 발표 직후인 지난 1일 열린 수출상황점검회의에서 주무 부처 장관인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우리 나라 대법원 판결을 이유로 한 경제 보복 조치”라고 규정했다.
9일 열린 WTO 상품무역이사회에서 백지아 주 제네바 대사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한국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서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경제보복 조치를 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책임의 소재가 일본 정부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강제징용피해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적시할 경우에는 ‘보복’이 적당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가치평가가 배제된 ‘일본의 수출규제’가 가장 무난할 수 있다. 한국 입장에서 가치평가를 반영한다면 ‘도발’(挑發, 남을 집적거려 일이 일어나게 함)이나, ‘행패’(行悖, 체면에 어그러지는 난폭한 짓을 버릇없이 함. 또는 그런 언행)가 어울릴 수 있다.
한국 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경제전문가로 칭해지는 애널리스트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일반 대중에게도 영향을 미치는데다 글로벌 경제 시대에 증권사 리포트는 외신 보도에도 인용될 가능성이 높다”며 “이번 기회에 맥락에 맞게 단어를 선택하는 기준을 확립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원호연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