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아니고 2009년에 드셨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오래된 보험일수록 유리하다는 믿음이 최근 깨졌다. 금융감독원의 실손의료보험 감리 결과를 받아 본 후다.
2008년 5월부터 2009년 10월 실손 표준화 작업 이전에 생명보험사에서 가입한 경우 보장률이 80% 임에도 그 이후에 나온 보장률 90%인 보험보다 보험료가 비쌌다. 금감원은 보험사가 보험료 책정 이유를 명확하게 소명하지 못하면 환급 조치할 방침이라고 약속했다. 이쯤 되면 보험도 복불복이다. 같은 사고를 당하고, 같은 금액을 청구해도 언제 가입했느냐에 따라 받는 보험금이 다르니 말이다. 또 같은 실손이어도 손해보험사냐 생명보험사냐에 따라 보장이 달라진다. 만약 같은 시기(2009년 10월 이전)에 운 좋게 손보사에서 가입했다면 자기 부담금을 한 푼도 내지않고 100% 보장을 받을 수 있다.
실손보험은 그동안 참 많이도 바뀌었다. 생보사와 손보사가 동일하게 자기부담금을 10%로 하고 3년마다 갱신하도록 하는 2009년 실손보험 표준화 작업 이후에도 4차례나 변경됐다. 2013년 1차 개정으로 보험료는 1년마다 자동갱신과 15년마다 재가입을, 자기부담금은 10%와 20%를 고를 수 있게 바뀌었다. 이어 2015년 2차 개정에서는 비급여 항목 자기 부담금이 20%로 높아졌다. 지난해 1월에도 실손의료보험의 표준약관이 일부 변경됐고, 올 4월에는 보험금 인상이 높은 특약을 따로 떼내 단독형 실손을 내놓았다.
문제는 이처럼 가입시기에 따라 보장범위가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몇 년도에 보험을 가입했는지 기억하고 있기도 힘든데, 몇 년도 가입일 경우 어떤 약관이 적용 됐는지는 더욱 알기 힘들다. 자기 부담이 0%이면서 보장이 많은 ‘슈퍼’ 실손에 가입했다면 운이 좋은 거고, 하필 보험료를 더 내고도 낮은 보장인 시기에 가입했다면 운 나쁜 사람이 된다.
정부의 비급여 전면 급여화로 건강보험 보장 확대방안이 나온 후 실손 해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이 언제 가입했는지를 살펴본 후 해지할지 관망할지 결정하라는 충고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험은 잘못을 발견해도 통으로 고칠 수 없어 문제가 크다. 그저 새로운 계약에서 이를 고쳐 나갈 수 밖에 없다.
자기 부담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 수퍼 실손 가입자는 10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앞으로도 엄청난 의료쇼핑을 할 권리를 누리게 된다. 반면 보장률이 낮은데 보험료를 더 낸 생보사 실손에 가입한 사람은 160만명 가량이다.
잘못된 보험상품을 만든 보험사의 책임도 이를 허가해준 정부의 과실도 모두 신규 가입자가 져야 한다. 기존 가입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구조로만 보면 신규 투자자 돈으로 기존 투자자들의 배를 불리는 폰지사기(Ponzi scheme)와 꼭 닮았다. 문재인 정부는 건강복지의 일환으로 건강보험 보장 확대를 추진 중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실손보험의 운명은 또 바뀔 수 있다. 더이상 복불복이 안나왔으면 좋겠지만, 예감은 썩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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