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퇴직연금 401(k)에 밀렸던 ‘회사연금’ 다시 등장

주가·채권금리 상승에 기업 연금재정도 개선

전문가 “연금 중심 회귀 아닌 선택적 부활”

[챗GPT 이미지생성]
[챗GPT 이미지생성]

[헤럴드경제=정목희 기자] 한때 소멸 수순을 밟는 듯했던 미국의 확정급여형 기업연금이 재조명받고 있다. 노조와의 임금·복지 협상에서 타결 카드로 쓰이거나, 인력 채용과 이탈 방지 경쟁이 치열한 업종을 중심으로 연금 제도를 되살리는 기업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모습이다.

1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IBM과 육류가공 대기업 JBS푸즈, 뉴욕과 코네티컷의 대형 의료시스템 노스웰헬스 등이 연금을 재도입하거나 새로 시작하는 대표적 기업이다. 직원이 급여의 일부를 적립해 노후 자금을 마련하는 확정기여형(DC) 제도인 401(k)와 달리 기업연금은 일반적으로 고용주가 비용을 부담하고 퇴직 후 평생 일정한 소득을 지급하는 구조다.

기업연금이 밀려난 계기는 2008년 금융위기였다. 주가 폭락과 함께 적립 규제까지 강화되자 상당수 기업이 재정 부담을 감당하지 못했고, 신규 가입을 아예 중단한 채 직원들을 401(k)로 옮겨가도록 유도했다.

27세의 매슈 크로닌은 전기·천연가스 공급업체 PECO로부터 연금 혜택을 새로 받게 됐다. 그는 앞으로도 401(k)에 계속 돈을 넣을 계획이지만, 향후 사회보장연금 삭감 가능성에 대비해 기업연금이 부족분을 보완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는 “연금이 있다는 것은 회사에 계속 남아 있게 만드는 큰 동기”라고 말했다.

비영리 조사기관 종업원복지연구소(EBRI)에 따르면 지난 2024년 미국 민간부문 근로자 가운데 기업연금에 가입한 비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1988년 약 30%에서 크게 줄어든 수준이다. 반면 공공부문 근로자들의 연금 가입률은 훨씬 높은 편이다.

최근 일부 연금 제도의 구조가 바뀌면서 기업 입장에서도 재정적 위험이 줄고 있다고 연금 컨설팅회사 옥토버스리의 존 로웰은 설명했다.

전통적인 연금은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근속연수와 임금 수준에 따라 평생 지급액을 확정해주는 방식이어서, 기업 입장에서는 비용 변동성이 크다는 것이 골칫거리였다. 이 때문에 비용 변동성이 크다는 문제를 줄이기 위해 IBM을 포함한 일부 기업은 1990년대부터 기존 연금을 ‘캐시 밸런스 연금’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캐시 밸런스 연금은 회사가 매년 직원 임금의 일반 비율을 계좌에 적립하고, 통상 이 국채금리와 연동된 일정 수익률을 보장하는 방식이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의 연금 전문가 올리비아 미첼 교수는 이런 변화가 기업들이 전통적인 연금에서 가장 꺼려했던 적립 리스크와 비용 불확실성을 상당 부분 해소됐다고 짚었다. 그는 “연금 중심 시스템으로 완전히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선택적인 부활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연금 관리업체 퓨처플랜 바이 어센서스에 따르면 지난 2023년 캐시 밸런스 연금 제도를 운영한 고용주는 약 2만6000곳으로, 2020년 약 2만3000곳보다 늘었다. 대부분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기업들이었다.

시장 환경도 기업들이 연금을 다시 검토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주가가 오르고 채권금리가 높아지면서 미래에 지급해야 할 연금 부담을 충당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현재는 운영 중인 연금은 물론 동결된 연금 가운데서도 적립금이 부채를 웃도는 경우가 많다. 기업들은 이 잉여자금을 현재 직원들의 연금 혜택에 활용할 수 있다.

연금 컨설팅업체 밀리먼 집계에 따르면 미국 100대 기업연금의 자산은 현재 부채의 112%를 충당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에는 이 비율이 77%에 불과했다.

노동조합이 연금 부활을 요구해 성과를 거둔 사례도 늘고 있다. 델타항공과 사우스웨스트항공 등 항공사들은 최근 조종사들을 위한 캐시 밸런스 연금 제도를 도입했다. 밀리먼의 조라스트 와디아 수석은 “가입자 측에서 이런 제도를 다시 시작하자는 요구가 상당히 강하게 올라오고 있다”고 말했다.

노스웰헬스는 지난해 여름부터 간호사와 행정직원을 대상으로 전통적인 연금 제도를 단계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연금 지급액 산정에는 근속연수와 최근 10년간의 임금이 반영된다. 전체 직원 10만8000명 가운데 약 3분의 1만 연금 가입 대상이기 때문에 회사가 장기적인 연금 부채를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펜실베이니아 전력회사 PECO 역시 지난 8월부터 대상 노조 직원들의 캐시 밸런스 연금 계좌에 매년 급여의 3~8%를 적립해주기 시작했다. 적립 비율은 연령이 높을수록 커지는 구조다. 다만 PECO의 모회사 엑셀론은 성명을 통해 이번 합의가 “다른 협상의 선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mokiya@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