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교통사고가 났다. “몇 대 몇” 판정 결과가 혹여 흐트러질까, 경찰관이 출동해 사고를 정리하기 전까지 차량을 사고 난 그대로 둔다. 보험사 사고처리 직원을 호출한다. 출동한 직원은 친절하게 사고 처리를 안내하지만, 정작 궁금한 건 물어도 답해주지도 않는다. 보험사의 판단이 전적으로 사고 책임을 결론짓는다.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가해자는 가해자대로 사고 처리 과정과 결과에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도로 위에선 귀중한 시간이 허비되고 주변 교통은 마비된다. 대한민국 사고처리의 현주소다.

한국교통연구원이 지난해 8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23년 한 해 동안 발생한 도로 교통사고는 125만2433건이다. 사망 2551명, 부상 193만9993명. 사고로 인한 피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54조595억원이다. 1분당 2.38건 사고에 사상자는 3.69명, 1028만원씩 사고 비용이 쌓인 셈이다. 피해 금액의 규모는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2.25%에 해당한다. 독일(0.79%, 2022년)의 2.8배 수준이다.

전체 교통사고 중 94%는 가벼운 사고라는 통계가 있다. 보험사에서 처리하기도 애매한 인적·물적 피해가 없는 사고라면 당사자끼리 10만~20만원을 지급하는 선에서 마무리한다. 하지만 인명피해가 없는 접촉 사고에도 자해 공갈 같은 일이 숱하게 벌어지기에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이는 곧 세금 낭비로 귀결된다. 그렇다고 이해 당사자가 될 수 있는 보험사에 사고처리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도 오롯이 신뢰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보험사로부터 독립적이면서 국민 편익과 공정성 확보를 위해 자치경찰 지휘 감독을 받는 제3의 전문자격 단체가 교통사고를 처리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전문 인력도 이미 존재한다. 도로교통사고 감정사다. 도로교통사고 감정사는 경찰청 인가 국가공인 전문자격 제도다. 보험 보상을 위한 사고조사와 감정을 전문으로 하는 인력으로 교통사고를 조사·수사하는 경찰, 군사경찰(헌병), 법원 공무원들이 취득해 업무에 활용하는 자격이기도 하다.

도로교통사고 감정사의 역할이 커지면 경미한 사고더라도 공학적 분석을 더해 처리할 수 있다. 감정사들이 주축이 된 가칭 ‘교통사고처리센터’를 자치경찰이 감독하는 기구로 두는 방안도 가능하다. 전문적인 감정으로 이해당사자인 보험사와 이용자 사이 갈등 소지를 줄여 보험금이 낭비되지 않는 보험 건전성 유지에 기여할 수 있다.

더불어 경찰관을 비롯한 퇴직 공무원을 위한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질 수 있다.

교통사고처리센터에서 모든 사고 처리를 도맡자는 의미는 아니다. 공소권 없는 경미한 사고를 전담하게 하자는 취지다. 한 통의 전화로 모든 사고 처리 절차를 통합 해결할 수 있는 ‘교통사고 원콜 서비스’ 시행 권한을 센터에 부여한다면 사고 당사자의 번거로움과 불필요한 처리 과정을 간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과 보험사, 구급차 등 모든 사고 처리 기관을 자동 연계해 사고 처리 진행 상황도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현행 제도 아래에선 경찰과 보험사 사이의 사고 조사와 처리 정보를 원활히 공유하기 어렵다. 사고 당사자가 억울한 피해를 입거나 당사가 사이에 법적 분쟁으로 법원 판단을 하세월 기다려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도로교통사고 감정사가 주축이 된, 중립적이면서도 공공성을 지닌 사고 조사 기구가 출범한다면 처리 속도를 크게 향상하고 불필요한 분쟁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54조원에 달하는 사고로 인한 사회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꾀병 환자, 보험사기, 교통체증과 같은 듣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단어들을 지울 해법이 될 것이다.

홍기현 (사)한국도로교통사고감정사협회 회장 전 경기남부경찰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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