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7회> 사랑을 위한 의식 (15)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유호성… 그래, 두고 보자. 한 대에 수백 억 원씩 하는 차를 모두 부숴먹더라도 내 기필코 너를 5개국 관통 랠리로 끌어들이고야 말테니까.”
재벌2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깜작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권도일이었다. 겉모습으로 보아서는 전혀 술에 취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재벌2세가 하는 짓은 술 취한 사람이 오기를 부리는 전형적인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 명차들을 부숴먹다니요? 혹시 F1 포뮬러 카로 벌이는 진짜 스피드 쇼크와 동일한 형태로 기획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 벌기 어려운 돈을 그런 식으로 낭비할 수 있나요? 그냥 얘기하다 보니까 성질이 나서 그렇지요.”
“성질이 나시다니요?”
“그까짓 운전수 녀석 한 명을 꼬여오는 일에 왜 그다지 신경을 써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단 말입니다.”
듣고 보니 권도일도 궁금하게 여겨왔던 내용이었다. 어째서 재벌2세는 유호성 선수를 거성의 드라이버로 영입하는 일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 것일까? 권도일은 문득 그 까닭이 궁금하기만 했다.
“그토록 애쓰면서 까지 유호성 선수를 영입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권도일은 단도직입적으로 재벌2세에게 물었다. 평소엔 감히 물을 수 없는 말을 묻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도 술에 취한 모양이었다.
“80 퍼센트가 아버님 때문이고 나머지 20 퍼센트가 내 오기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서 내게 당부하셨지요. 이번 5개국 관통 랠리에서는 불에 검게 탄 1974년 산 ‘치타’를 몰고나가 기필코 우승을 쟁취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재벌2세는 이 대목에서 독한 양주 한 잔을 딸아 권도일에게 재차 권했다. 그리고는 눈빛으로 단숨에 들이킬 것을 요구하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 험한 랠리에 1974년 산 낡은 치타를 몰고나가 우승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는 현재로선 당신… 권도일 선수와 유호성 선수가 한 팀을 이루어 달리는 방법 외엔 없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렇군요. 그래서 유호성을 그토록 원하고 계셨군요. 하지만 왕 회장님께선 무슨 까닭에 랠리 우승컵을 쟁취하려는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궁금해요?”
재벌2세는 이렇게 되받아 물었지만 더 이상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권도일은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재벌2세의 부친인 왕 회장은 더 이상 늙기 전에 친구의 한을 풀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언 38년 전, 재벌2세의 부친인 왕 회장이 열혈청춘이던 그 시절에… 왕 회장은 파리-다카르 랠리에 출전한 드라이버였음을… 권도일은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다.
“그날, 해질 녘의 사하라 사막은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언제던가, 권도일이 재벌2세를 처음으로 찾아가 만나던 날… 그는 승용차 뒷자리에 권도일을 나란히 앉히고는 고백하듯이 제 아버지 왕 회장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던가. 파리-다카르 랠리 7일째 구간, 죽음의 스테이지에서 사막의 도적떼인 뚜아렉 족에게 쫓기던 1974년 산 치타는 모래구덩이 속으로 굴러 뒤집어지고…
“그날 친구를 불태워 죽인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오래 전 일이지만 아버님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셨겠지요. 그 한을 이제라도 풀고 싶은 게지요.”
재벌2세의 혀가 꼬이는 걸 보니… 어느덧 술에 깊이 취한 모양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