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샤와 란제리 마네킹은 같은 투쟁이다(Geisha et mannequin de lingerie, meme combat)

란제리 마네킹들을 보여주는 포스터가 왜 저급한 포르노그라피와 동일시될까? 거대자본에 종속된다는 이유로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비난하는 이들은 ‘일본 현인들 이야기’라는 책을 읽어본 걸까?

다양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반라의 여성들로 채워진 광고들을 보면서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의 몸이 충격적이고 불건전한 그 무엇을 보유하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몸이 매력적일 때는 더욱 그렇다.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비난받아야 할까? 옛날이었다면 이들은 칼과 끌을 이용해 그리스 로마 시대 조각들을 다듬고, 고대 비너스들에 옷을 입히며, 대가들이 제작한 그림들에 덧칠했을 터이다. 바티칸에는 ‘수정을 가한’ 나신(裸身)들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란제리, 화장품, 향수 광고에 반대하며 항의하는 이들에게 바티칸 얘기를 꺼내면 그들은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종교적 금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육체의 상품화이지요.”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검열관 일부는 우리가 ‘성의 독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단언한다.

성의 독재가 우리에게 에로틱을 강요하면서 희생자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광고를 통해 성적 대상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비방 어린 ‘성적 대상’이란 표현을 통해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걸 드러낸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치명적 전략들(Les Strategies Fatales)’이란 책에서 탁월한 반어법을 통해 이 케케묵은 개념을 공격하고 있다. 그는 “성적 대상 만세! 유혹 만세!”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서구문화 속에서 ‘대상’이 된다는 것은 수세기 전부터 아주 부정적으로 인식됐다.

주체만이 인간에 어울리는 유일한 위상으로 간주된 것이다. “유혹은 이교도적이고 사랑은 기독교적이다. 사랑하고, 또 사랑받기를 원하기 시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부터다.

종교는 정서, 고통인 동시에 사랑이 되었다. 낡아빠진 고대 문화와 신화들은 그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고대 문화와 신화는 놀이 속에, 의식(儀式)과 변형 속에, 따라서 탁월한 유혹행위 속에 존재했다.” 보드리야르 입장에서 대상(오브제)은 수동적이지도, 허약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진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

유혹하고 정복하는 동시에, 겉으로는 수동적이고 허약하거나 취약한 척하면서도 아이러니를 통해 파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대상으로서의 여성’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뒤에 모습을 숨기면서 지배관계를 뒤엎는다. 여성은 마음껏 다룰 수 있는 존재라는 착각만을 제공할 따름이다. 관객들은 여성이 투사해 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웃음거리가 된다. “나의 육체를 원하세요? 그러시다면 오직 그것만을 제공할게요.” 덫에 걸리고,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남성들이다. 가령 대부분의 스트립 걸은 속임수를 구사한다.

실리콘을 주입한 ‘얼간이들’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러대고 고양이 소리를 내기 위해 클럽을 찾는 남녀들은 승리를 거둔 채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한 겹씩 옷을 벗는 스트립쇼는 바로 우리들의 병적인 모습을 투영하고 있을 뿐이다. 옷을 벗고 있는 자가 누구일까?

히스테리 증세를 보여주는 여성 관객일까, 아니면 ‘치펀데일’ 댄서들일까?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관음증 환자들일까, 아니면 봉춤을 추는 운동선수들일까? 당신이 짧은 치마에 던지는 시선을 믿지 마라. 손을 갖다대는, 대상을 더럽히는 바로 그 순간 이 시선은 음탕한 것으로 변한다.

이런 생각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한 이야기가 아시아의 구전 전통 속에 존재한다. ‘일본 현인들 이야기(Contes des sages au Japon)’ 속에서 파스칼 폴리오(Pascal Fauliot)는 신랄한 필치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두 명의 선승이 폭풍우 속에서 버드나무와 꽃들이 흐드러진 길을 따라 걸으며 절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두 수도사는 비슷한 구석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한 선승은 뚱뚱한 타입에 유쾌한 얼굴을 하고 있고 배가 튀어나왔다. 한마디로 낙천적인 타입이다.

그와 반대로 금욕적이고도 무척 수척한 다른 선승은 단호한 태도와 뻣뻣한 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더없이 엄격한 모습을 뽐내는 듯이 드러낸다. 교차로에 다다랐을 때 둘은 우산을 쓰고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한 게이샤를 목격했다. 값비싼 비단 기모노를 더럽히지 않고서는 그녀가 길을 집어삼킨 진흙투성이 급류를 건너갈 수 없었던 것이다.

게이샤가 덫에 걸린 꼴이었다. 메마른 동료가 게이샤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린 반면, 너그러운 단잔(Tanzan)은 그녀에게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게이샤가 미처 답하기도 전에 단잔은 그녀를 번쩍 안아서 도랑을 건넌 후 그 ‘매혹적인 짐’을 길 반대편에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두 선승은 가던 길을 계속했다. 도덕적인 선승의 내부에서는 격정이 끓어올랐다. 김이 그의 밀짚모자를 뚫고 무럭무럭 새어나올 정도였다. 마치 뚜껑이 날아가기 직전의 냄비 모습을 닮아 있었다. 그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승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은 경건한 기도가 아니라 신랄한 비난이었다. 불타오르는 시선을 동료에게 쏘아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절 문을 들어서며 단잔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나에게 이야기해 주시겠소?”라고 물어보았다. 깡마른 선승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분노를 터뜨렸다. “무엇이 잘못되었다고요? 당신이 선승인데도 불구하고 한 여자를 끌어안았소. 그것도 게이샤를! 그런 식으로 자신을 더럽힐 수가 있소?”

온화한 단잔은 다음과 같이 즐겁게 대답했다. “아니죠. 우리 중에 누가 더 몸을 더럽혔는지 당신이 아실 겁니다. 나는 오래전에 이 여성을 길가에 내버렸지요.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그녀를 가슴속에 품고 있네요.” 파스칼 폴리오가 쓴 ‘일본 현인들 이야기’는 쇠이유(Seuil) 출판사가, 장 보드리야르의 저서 ‘치명적 전략들’은 그라세(Grasset)가 펴냈다.

(이미지는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의 광고) 글=아녜스 지아르(佛칼럼니스트), 번역=이상빈(문학박사ㆍ불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