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峨山) 정주영 회장이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에서 일을 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982년 7월 14일부터 1984년 9월 30일까지 2년2개월 동안 대한체육회의 회장 직책을 맡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까지 불려가는 고생(?) 끝에 ‘1년만 해보겠다’는 조건으로 떠맡은 자리였다. 원칙을 가지고 일을 했지만 그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추천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다가 결국 해임 통고를 받았다. 아산은 “껄끄럽기도 했겠지만 몽준이가 울산에서 무소속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이 해임 이유였을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올림픽 유치를 앞두고 상황이 어려워지자 ‘망신을 당해도 정주영이 네가 당해라’는 정부의 의도였다는 것이 아산의 생각이다. 그는 함께 유치를 맡게 된 공무원들의 소극적인 태도와 패배주의 시각에도 현대의 네트워크와 특유의 긍정적 사고, 그리고 근면성으로 ‘일본 나고야의 올림픽 유치는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모두의 전망을 깨고, 52대27이라는 기적 같은 결과로 ‘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했다.
아산은 19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을 당시 그곳에 있었다. 참배를 하러 가진 않았지만, 17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은 당시의 참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경험했다. 이후 당시 대통령의 요청으로 희생당한 유가족을 위한 명목의 갹출이 이뤄졌고, 정 회장은 일해재단 설립 일부 비용은 물론, 부지마저 제공해야 했다. 향후 유족 지원보다는 대통령의 야심에 의해 변질된 이 일해재단 때문에 그는 청문회에도 출석해야 했다.
기업가이지만 가끔 타의에 의해 외도를 살짝 했던 그는 급기야 1992년 1월 1일 새해 차례를 지내기 위해 모인 가족들에게 정치 참여를 통고했다. 실패했을 경우 현대가 감수해야 할 불이익으로 가족들은 반대했지만 ‘시궁창(정치)을 시궁창으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정치에 나섰다. 그 해 통일국민당은 창당 3개월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31석을 차지해 캐스팅 보트를 쥐었고, 5월 15일 임시 전당대회를 통해 정주영을 대선 후보로 뽑았다.
결국 대선에서 아산은 패배했고, 추앙받는 기업가, 최고의 창업가로서 정치 참여라는 오점 아닌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선거에 나가서 뽑히지 못했을 뿐이다. 후회는 없다.”
<김대연 기자> /sonamu@herald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