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바람 부는 길(29)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딸이 홀딱 벗고 제 아버지 비리를 폭로했는데도 언론의 반응이 신통치 않으니 그 딸은 지금쯤 열 받아 있겠군. 기자들도 이미 까발렸던 기사를 이제 와서 재탕하기 싫었겠지. 그러니 초점을 ‘몸살녀’ 쪽에 맞출 수밖에. 그건 그렇고… 옆에서 같이 벗고 날뛰는 여자는 누굽니까?”
“유민 회장 마누라 편에서 활약하는 골프선수 같습니다.”
“참, 유민 회장 마누라가 재산을 갈라서 나갔다고 했지요? 이혼 했나요?”
“아직 법적으로는 완결 짓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재산평가를 놓고 둘 사이에 이견을 좁히기 힘든 모양입니다.”
“그래요? 이거 참… 여러 가지로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군. 안팎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으니 유민 회장이 임무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그러지 않아도 총재께서 걱정하고 계십니다. 돈도 많이 들지만 열정이 없으면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임무인데… 고작 형사사건을 무마해 준다는 조건으로 유민 회장의 코를 꿴 것이 실수 아닐까 하고 우려하셨습니다.”
“그래요? 총재께서?”
소위 ‘높은 양반’은 보좌관의 말을 듣고 깊은 고민에 잠겨들었다. 장차 벌어지게 될 5개국 관통 랠리대회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랠리 머신들이 북한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계 유수의 경주용 자동차들이 북한 영토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김정은 위원장의 결심을 받아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수차례 이상 북한을 드나들며 비밀협상이라도 벌여야 할 텐데… 마누라와도 갈라서고 재산도 반 토막 난 상태에서 임무를 제대로 완수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북한의 김정은이 몇 살이지요? 서른 살은 넘었나?”
“아직 20대 아닙니까?”
“그럼 유민 회장은 몇 살이지요?”
“환갑을 넘은지 한참 지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둘이 잘 어울릴까요? 20대 청년과 60대 노인…”
“그렇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많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이 바뀐 것입니다. 첫째로 유민 회장의 개인사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고, 둘째로 북한의 정세가 갑자기 변했습니다. 북한 김정은의 정치적 성향도 모르면서 우린 5개국 관통 랠리경기를 추진해야 하고 그에 앞서서 물밑 작업을 벌여야 하는 실정입니다.”
“그렇소. 그렇다고 대통령 선거 일자를 뒤로 물릴 수도 없고… 그래서 묻는 말인데요, 거성 자동차그룹의 재벌2세를 만나본 적 있습니까?”
소위 ‘높은 양반’은 또 다른 신문 사진을 영사막에 갈아 끼우면서 낮은 목소리로 보좌관에게 물었다. 정녕 몰라서 물어보는 말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그는 오랫동안 숙성시켜온 생각을 스스로 재확인하려는 과정이었다. 영사막에는 스키장 VIP 실에 앉아서 쌍안경으로 밖을 내다보는 거성그룹 재벌 2세의 사진이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이 사람이 거성의 재벌 2세입니까? 아직 젊은데요?”
“젊지요, 30대 후반 나이니까. 하지만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에 비하면 무척 늙은 셈이지요.”
“그럼… 거성의 재벌 2세를 북한에 보내려는 계획입니까? 무슨 구실로 그의 코를 꿰지요?”
보좌관의 물음에 높은 양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재벌 2세가 자동차 레이싱에 대한 열정에 빠져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게릴라 레이싱이라는 기발한 경기를 추진했을까? 하지만 그 확신부터가 오산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