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와 정개개편’을 논할 때 일부 정치분석가들은 ‘제3의 진원지’라는 뜻으로 ‘블랙홀’이라는 말을 쓴다.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신진 정치인이 혜성같이 나타나 대중의 인기를 모으면서 기성정치인들 중에서 정치개혁에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을 급속히 빨아들여 정치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의미이다.
워싱턴 정가에서 10~20년에 한번씩 나타나는 이 블랙홀 이론의 대표적인 주인공은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이다.
무명 영화배우 출신으로 70세에 권좌에 오른 로널드 레이건은 지미 카터가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꼽힐 정도로 재정적자를 키우고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동맹을 잃어 미국의 힘을 약화시킨 점에 주목, ‘강하고 풍요로운 미국 건설’을 기치로 정치세력을 급속히 확장한 바 있다. 그가 취임 직후 저격당해 입원했을 때 “할리우드에서 이렇게 저격당할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면 배우를 그만두지 않았을 텐데...”라는 농담을 건넨 일로 유명하다.
빌 클린턴은 유복자로 태어나 결손가정에서 소년시절을 보냈음에도 따뜻함과 추진력을 겸비해 최연소 주지사를 거머쥐었던 인물. 대선국면에서도 젊은 그의 정치기반은 미약했지만, 소련붕괴 이후 국제적 강대국의 위상 보다는 경제적 안정을 원했던 시대정신을 움켜쥐고 패기를 앞세워 패권주의에 매몰된 극보수파를 제외한 나머지 정치인들의 추앙을 받고 46세때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같은 ‘정치개혁 블랙홀’은 국내에서도 부분적으로 엿보였으나, 뿌리깊은 정파 기득권 유지 본능 등의 요인으로 레이건이나 클린턴 같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경우는 아직 없다. 그나마 2002년 노무현의 등장은 한국판 정치개혁 블랙홀로 여길만 하다.
구태정치 청산, 지역주의 타파 등을 기치로 영남출신이면서도 호남정권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져 민주당 경선 중반전부터 이인제 우세론을 제압하고 후보가 된데 이어, 이회창 대세론까지 넘으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바 있다. 7~8명의 잠룡들에게 분산됐던 개혁파 정치인들은 소수 호남비주류를 제외하곤 경선 막판 노무현에게 급격히 쏠렸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집권후 그는 당내에선 사사건건 호남의 견제를 받아야 했고, 당 밖으로는 자신의 참뜻이 전달되기 보다는 ‘독특한 정치언행’이 빌미가 돼 숱한 구설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 안철수가 떴다. 그는 제3의 정치세력 추진의 뜻을 밝혔다. 몇몇 조사기관의 여론동향을 보면, 현재로선 여야에서 거론되는 유력 후보의 2~3배 지지율을 기록할 정도로 압도적 우세이다.
정당활동을 해본 적도 없고, 전통적인 이념구분법상 진보인지 보수인지도 알기 어렵다. 그저 인간을 위한 마음에서 사업을 시작해 컴퓨터 백신을 만들고 시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인물이지, ‘정치적 슬로건’이 뭔지도 분명치 않다. 흔히 정치인들이 내놓은 정치적 수사(修辭) 투성이의 청사진 보다, 그가 지금까지 실천해온 것만으로도 꿈과 희망을 심고 기성 정치인들과 차별화하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도 들린다.
하지만 헤쳐 나가야할 장애물은 한두가지가 아닌 것 같다. 레이건, 클린턴, 노무현이 모두 기존 정당을 기반으로 ‘정치판 청소’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혈혈단신으로 청소에 나선 안철수의 도전은 매우 실험적이다. 정당 기반없이 정치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모험’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안철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러 가능성을 둘 수 있다”면서 여지를 남겼다.
수백년 근현대 정치사가 말해주듯, 정적을 누르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대결 구도와 비전이 분명해야 하는데 이에 관해 안철수는 뭘 생각하는지 아직으로서는 알수가 없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개인 인기일 뿐이다”고 평가절하한다.
‘제3의 길’ 답게, 이를테면, 생활과 정치공학의 대결이라든지, 나눔과 탐욕의 대결, 실천과 말의 대결이라든지 하는 ‘전선(戰線)’을 구축하고, ‘~을 통한 ~의 구현’이라는 슬로건이 분명해야 하지만, 오랜세월 IT와 경영, 교육에 몰두해온 안철수가 인간적 인기를 정치적 지지로 바꿀수 있는 툴(Tool)을 개발할지 주목된다. 미국 워싱턴 정가의 신진정치세력들도 기존 정치문화를 딛고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메시지’가 분명했다. 유권자들은 결코 “왠지 잘할 것 같아”라는 생각으로 표를 주지는 않는다.
아울러 뜻있는 정치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흡인력이다. 2007년 ‘제3지대론’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돌아보면, 우리 정치인들의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 수 있다. 흡인력을 키우기 위해 안철수는 이런 꿈을 꾸고 이런 ‘실천 툴’이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그 만큼 적극적인 행보가 요구된다. 블랙홀로 빨아들이기는 커녕, 자칫 성능우수한 총을 가진 기성 정치인에 저격당하면서 참뜻과 그간의 업적이 함께 날아가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방탄 툴’ 역시 마련해둘 필요가 있다.
바꿔 말하면 ‘정치개혁 블랙홀’의 기본 조건 충족을 위해 안철수는 본질적인 것 이외의 부분에서 적지않게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어! 안철수가 변했네”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도 과제다. 주지하다시피 정치개혁 블랙홀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집권(또는 취임, 세력형성)이후 업적 평가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안철수의 실험이 최소한, 절반의 성공이라도 거뒀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한강물이 더러워질까봐 정치판을 한강에도 처넣을 수 없다“는 시민들의 냉소가 크게 줄어들지도 모를테니까.
<함영훈 선임기자 @hamcho3> abc@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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