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날개에 숨긴 칼 (22)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겨울철, 국내 스키장엘 가보면 슬로프 입구마다 초급자용, 중급자용, 상급자용이라는 팻말이 붙어있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동네 목욕탕엘 가 봐도 물을 받아놓은 커다란 욕조마다 그 앞에 열탕, 온탕, 냉탕이란 팻말이 붙어있다. 알아서 기라는 뜻이다. 상급자용 슬로프에 올라가서 엉덩이로 스키를 타고 내려오든, 열탕에 들어가서 껍데기를 익히든…

“어렵다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잖아요? 도대체 어려우면 얼마나 어려운지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해줘야 옳지 않아요?”

까칠하게 말을 받는 사람은 유한솜이었다. 그녀는 어제까지만 해도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서 은단 집어삼킨 암탉처럼 온종일 졸고만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팔팔하게 살아났으니 강준호로서는 부담이 될 만도 했다.

“코올라우 골프장은… 예를 들어서 평균 5언더 파를 치는 타이거 우즈가 가장 좋은 날씨를 택해서 라운드 했을 경우에도 75타 이하로는 치기 힘든 곳이지. 다른 골프장보다 8~10타 정도나 더 치게 되는 곳이야.”

강준호는 주머니에서 공을 꺼내어 그 위에 자기 이름을 표기하는 중이었다. 그는 당당히 세 알의 공에만 이름을 표기했다. 이를테면 라운드 하는 동안 두 개 이상의 공은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란 자신감의 표시였다.

“그러니 신 여사님은 공 50개에 이름을 써놓으셔야 할 겁니다.”

“코스레이팅이 75란 말이군요? 정말 공 50개쯤은 쉽게 날리겠네.”

골프와 관련된 말 중에 ‘코스레이팅 (Course Rating)’ 이란 용어가 있다. 핸디캡이 0인 선수가 바람 없는 가장 좋은 날씨를 택하여 가장 컨디션이 좋은 상태에서 경기에 임했을 때 이루어낸 평균스코어를 뜻한다. 보통 선수들의 스코어와 비교하면 되는데, 코올라우 코스의 경우 74.5라고 한다.

“슬로프레이팅은 최상위 포인트, 155나 돼요, 회장님.”

이번엔 유리가 나섰다. 그녀는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골프선수였지만 이미 다섯 알의 골프공에 이름표기를 해놓은 상태였다. 강준호에 비해 훨씬 겸손한 자세로 게임에 임한다고나 할까?

슬로프레이팅 (Slope Rating)이란 미국 골프협회에서 아마추어 골퍼들을 상대로 하여 난이도를 정해놓은 수치이다. 호텔 사우나에 가면 열탕, 온탕, 냉탕이란 두루뭉수리한 표기 대신 섭씨 45도, 섭씨 20도 등으로 써놓았듯이 수치로 코스의 어려움을 표시해 놓은 것을 일컫는다. 제일 쉬운 곳이 55, 평균이 113이고 가장 어려운 곳이 155로 정해져 있다. 물론 코올라우 골프코스는 가장 상위점인 155로 정해져 있다.

“천하의 강유리 프로가 공을 다섯 알이나 꺼냈어요? 허허… 골프를 칠 때엔 ‘자집서’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이 별로 없는 모양이군요?”

강준호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물론 신희영의 면전이었으므로 서로 부녀지간이라는 사실이 들통 나지 않도록 철저히 존대를 하는 중이었다.

“자집서? 그게 무슨 뜻이에요?”

“자신 있게, 집중해서, 그리고 서서히 골프를 치란 말입니다. 특히 자신 있게!”

호놀룰루 공항에서 코올라우 골프클럽까지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하이웨이를 따라 30여 분 가량 달리다가 산길로 들어서니 곧바로 클럽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팀 구성은 신희영, 강준호, 한승우, 공 과장이 한 팀, 강유리와 그녀의 매니저 백광돌, 그리고 100돌이라 불리는 박 대리와 초보자 유한솜이 따로 팀을 이루었다. 사실 공 과장과 박 대리는 캐디노릇이나 하라는 것과 다름없는 팀 구성이었다.

“이거 야단났군. 비가 오려고 해요.”

매니저 백광돌은 잔뜩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심초사했다. 흰색 반팔 셔츠 안에 빨간색 스포츠브라를 받쳐 입은 유리 때문이었다. 셔츠가 비에 젖어 달라붙으면 빨간 브래지어가 유독 섹시하게 드러날 것 아니겠는가? 한때 젖꼭지를 비틀어 주며 야릇한 지경까지 이르렀던 유리… 그녀를 며칠 째 돌부처 대하듯 하기가 너무 힘들었던 와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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