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날개에 숨긴 칼 (19)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30 여 년 전의 주소가 적힌 명단 한 장만을 달랑 들고 전국을 누비는 권도일은 빠르게 지쳐갔다. 아직 초여름 날씨라고는 하지만 대책 없이 시골동네를 누비다 보면 온 몸에서 육골즙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고단함과 더위에 지치면 누구라도 철학자가 되는 것일까? 문득 아침이슬 같은 인생, 이리 힘들게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라도 하면 논두렁길에 주저앉아 멍하니 뜬 구름만 올려다보곤 할 뿐이었다.

“요즘 것들이 얼마나 낭비가 심한 줄 젊은이도 잘 알잖여? 텔레비전, 전축… 이런 것들은 한 철만 쓰고 나면 골동품 취급 당해유. 심지어 마누라도 철마다 갈아버리는 세상인데 뭐가 어째유? 30년이 넘은 자동차를 아직껏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냐고?”

“어디 창고 같은 곳에 보관하고 있는 사람도 없을까요?”

“앗따, 요즘은 시골 노인네들이 봉이유. 아들, 딸들이 죄 나서서 땅 잡히고 집 잡혀가지고 사업을 합네 어쩌네 하는 통에 쥐뿔도 남은 게 없어. 창고를 까 뒤집어봐야 쥐똥밖엔 안 나올 거유. 그러니 도시로 나가서 찾아보는 편이 수월할 게유.”

이장이건, 마을 회장이건 간에 그들은 대답 대신 하품만 길게 해댈 뿐이었다. 하긴 천지개벽을 한 이 마당에 촌구석이라고 해서 37년 전에 생산된 치타를 타고 다닐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도시엔 전부 신형 차만 굴러다니더라고요. 오죽 답답하면 이런 시골까지 치타를 찾으러 왔겠어요?”

“그러게… 도와줄 수 없으니 안타깝구먼. 차라리 동남아 쪽을 뒤져보지 그래유? 내 사위가 얼마 전에 월남엘 다녀왔는데… 글쎄 우리 동네에서부터 저쪽 마을 경로당까지 다니던 버스가 거기에서 굴러다닌다지 뭐유?”

30년 전 주소를 들고 찾아가는 곳마다 대충 이런 식이었으니 더 이상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거성자동차 오너 2세의 명령이었으니 치타를 찾아내지 않고는 랠리경기에 출전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인생무상, 삶의 회의… 명단에 적힌 주소지를 모두 뒤져보았지만 치타를 찾아낼 방법은 점점 더 묘연해지기만 했다. 그렇게 온 몸의 맥이 풀리던 차에 현성애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기 화면에 떠오른 그녀의 이름을 보자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은… 그나마 돌아서서 찾아갈 한 가닥 외길이라도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일 씨? 지금 막 튜닝 설계도를 완성했어요. 도일 씨가 치타만 구해오면 한 달 내에 천하무적의 머신으로 탈바꿈 시켜놓을 자신이 있어요. 외형이 문제인데… 보나마나 차체의 강판이 녹슬고 약해졌을 테니 전면에 카본재질로 덧칠을 해야겠어요.”

그녀는 자못 들뜬 모습이었다. 유민 재벌가문에 복수할 기회가 점점 가까워 온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튜닝 전문가로서 일생일대의 작품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의욕이 생생히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아직 못 찾았어. 경운기도 찾기 어려운 판에 1974년산 치타를 어떻게 찾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야.”

“옛날 주소를 뒤져서는 찾아내기 어려울 거예요. 자동차박물관은 뒤져봤어요? 우리나라엔 리스토어 개러지도 없나? 차라리 고물상을 뒤져볼까요?”

“혹시 인터넷을 뒤져서 클래식 카 수집가 명단 좀 알아봐줘요. 클래식 카에 미친 마니아들은 어쩌면 1974년산 치타를 보유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그게 마지막 방법예요. 그래도 찾을 수 없다면…”

“그래도 찾을 수 없다면 어쩌려고요?”

“거성 재벌 2세에게 무릎 꿇고 사정해야지. 꼭 치타 아니어도 랠리에 출전해서 우승컵을 안겨주겠노라고 사정해야지.”

권도일과 현성애는 전화기를 사이에 둔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러나 서로의 울먹이는 숨결은 고스란히 송수화기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어떤 난관을 겪더라도 랠리에 출전하자. 랠리에서 유호성의 머신을 보기 좋게 앞질러야만 우리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거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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