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 ‘만세전’으로 한글 소설의 현대적 문체를 확립한 소설가 횡보 염상섭(橫步 廉想涉ㆍ1897~1963)은 도쿄 유학 시절 무애 양주동과 하숙방을 같이 썼다. 유학생활은 식민지 도쿄 유학생들이 대체로 그렇듯 궁기를 깔고 사는 허기의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질세라 주량을 다퉜던 둘은 원고료가 서울에서 도착하면 술값으로 태반을 날렸다. 고료를 쓰는 둘의 태도는 달랐다. 무애는 학비로 고료가 오면 먼저 방세를 내고 나머지를 상섭에게 털어놓은 뒤 나가 술을 마셨다.

반면, 상섭은 고료만 오면 일단 입을 딱 씻고 본다. 그러다 무애가 눈치를 채고 술집으로 이끌면 그때부터 발동이 걸려 돈을 다 털 때까지 마셔댔다. 서울에서 고료로 보내온 돈은 30원. 당시 한 달 숙식비로 넉넉한 돈이지만 그날 하루 술값으로 다 날리고 마는 것이다.

둘의 술내기는 백주회(百酒會)로 진화한다. 하룻밤에 정종, 왜소주, 각종 맥주, 황주, 배갈, 오가피주, 벨모트, 진, 위스키, 브랜디까지 백 가지 술을 모조리 한 잔씩 먹는 것. 둘은 돈이 떨어지면 그냥 굶었다. 움직이지 않는 게 공복을 덜 수 있는 최선이란 생각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지냈다.

그런 와중에도 횡보는 밤새워 글을 썼다. 그의 글은 서울중인의 토박이말과 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사에서의 위치가 남다르다. 특히 염상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광수의 계몽, 집단의식을 넘어선 개성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문학적 성취다. 우리 근대문학의 한 획을 그은 횡보 염상섭의 좌상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종로 출입구에 4월 1일 들어섰다.

1996년 ‘문학의 해’를 기념해 종묘공원에 세워졌던 것이 2009년 종묘광장 정비 사업으로 삼청공원 약수터로 옮겨졌다가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김영중의 작품으로, 벤치 형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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