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서병기 기자]사극에서 왕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사극의 왕을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 지도자와 비교해 볼 수 있다. 대선이 끝나고 ‘박근혜 정부’가 오는 25일 출범하지만 매스콤은 여전히 정치 과잉이다. 지상파나 종편 모두 시사물에 차기 정부의 정치를 단골 의제로 삼고 있다.
드라마는 현실정치를 다루기가 어렵다. 정치는 민감한 부분이 많아 현대극보다는 사극을 통해 드러내거나,빗대어 말하는 게 효과적이다. 물론 별로 정치적인 함의를 담지 않은 담담한 사극도 있다. ‘해를 품은 달’ ‘옥탑방 왕세자’ ‘ 닥터진’과 같은 판타지 퓨전 사극이 흥미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개혁군주와 처세술, 모사, 파워게임을 즐기는 본격 정치사극도 적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를 끄는 점이 있다. 정치사극에 등장하는 왕, 소위 지도자의 모습이 시대에 따라 몇 단계의 변화를 겪어 왔다는 점이다.
‘용의 눈물’은 강력한 개혁군주를 원하는 시절이라 이방원이 피비린내 나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진압해 대권을 잡은 후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어쩌면 ‘악어의 눈물’일 수도 있는 이 상황을 시대 정서가 정당화해 줬다. 지금 같으면 어림없다. 특히 강력한 카리스마의 군주가 “여봐라” 하고 말하면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고개 숙였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독재자형 절대군주에서 합리적인 CEO형 왕으로 바뀌었다. 정치를 지배가 아닌 경영의 장(場)으로 본 것이다. CEO 왕들은 호통형이 아니다. ‘이산’에서 낮게 깔리는 이서진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한 ‘완소남’계열이었다. ‘태왕사신기’의 ‘쥬신의 왕’ 담덕(배용준)도 부드럽고 여성적이었다. 얼굴에는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관미성 전투를 지휘하는 담덕의 모습은 부드러움 그 자체였다.
백성을 위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태왕사신기의 담덕은 관미성 전투에 앞서 “목숨 바쳐 죽어버리는 군사는 필요 없다.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전의 왕들은 어땠는가. 전장에 나가는 병사에게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칠 각오가 돼 있나?”하고 비장하게 물었다.
왕의 주변인물을 그리는 방식도 달라졌다. 지난해 종영한 ‘신의’는 킹 메이커인 최영(이민호)의 입을 빌려 우리가 왕(지도자)에게 바라는 바를 이야기했다. 공민왕의 ‘경호실장’인 최영은 오로지 왕 한 사람만을 위하는 ‘닥치고 복종형’이 아니다. 왕을 향한 대책 없는 충성심이 오히려 ‘지능적인 안티’가 될 수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최영은 왕의 부속물이 아니라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왕에게 다가갔다. 덕흥군이 볼모로 잡은 은수(김희선)를 데려가려면 최영에게 왕의 옥새를 가져오라고 하고, 최영은 옥새를 거절하는 공민왕에게 “우리에게 왕이 왜 필요한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라고 직언한다. 하지만 공민왕에 대한 충심만은 철저하다. 이런 점이 나약하고 예민한 공민왕으로 하여금 원이 장악한 정동행성을 치는 결단력을 발휘하게 했다.
요즘은 정치사극에서 등장인물의 인간적 고뇌를 그리는 게 추세다. 그래서 겉모습의 권위를 벗겨 내고 점점 내면 속으로 들어간다. 왕 스스로건, 킹 메이커를 통해 투영된 왕이건 점차 ‘일반인화(化)’되었다.
‘마의’의 조선 18대 왕 현종(한상진)은 권신들로부터 정통성 문제로 공격당하지만 어설픈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눈높이를 많이 낮춘다. 기근과 역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신중히 판단한다. 의학으로 부와 권력을 쌓으려는 이명환(손창민)파들을 견제하고, 매번 이들에게 당하는 백광현(조승우)을 종7품 의관(직장)으로 제수하는 것이야말로 그를 최고의 지도자로 만드는 한 수의 선택이다.
최근 종영한 ‘대풍수’의 이성계는 초반에는 체면을 벗어던진 자유분방한 인물로 그려졌다. 야수와 같은 분장으로 왕이라기보다 산중호걸에 가까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겉은 거칠어도 속은 한없이 인자하다. 그는 부하가 실수해도 벌은 줄지언정 절대 부하를 버리지 않는다. 우야숙(도기석)이 큰 잘못을 했지만 용서했다. 이성계는 우야숙과 이지란이라는 참모가 있어 새로운 왕조를 열 수 있었다. 어쨌든 사극에서 당대의 대중정서를 읽어 낸 왕만이 시청자와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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