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0회> 총칼 없는 전쟁 (10)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세모시 고쟁이를 보기도 전인데 벌써 눈이 멀어버렸다니… 피난구역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시트를 뒤로 젖힌 채로 누워 강유리를 기다리는 유호성의 처지가 꼭 이와 같았다. 세모시란 살이 훤히 비치는 옷, 이른바 시스루 룩이나 다름없었고, 고쟁이란 요즈음 내복과 같은 언더웨어였으므로 세모시 고쟁이를 입은 여인의 고혹적인 매무새에 넋이 홀랑 빠져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강유리와 만나기로 약속 한 이후부터 그는 상상 속을 헤매는 중이었다. 1974년 산 치타의 조종석에는 소위 풀 하니스 시트벨트라고 하는 4점식 안전벨트가 장착되어 있었다. 의무적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아도 서킷이라든지 험로를 달리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주요 장비였다.

4점식 시트벨트를 단단히 조여매고 헬멧을 쓰면 그야말로 기본적인 안전은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일반 승용차의 3점식 벨트는 정면충격에는 유효할지 몰라도 엇비스듬히 옆으로부터 충격을 받았을 경우엔 벗겨질 위험성이 다분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양 어깨를 완전히 밀착시켜 조여매고 하면… 죽일 거야.’

하지만 유호성이 간파한 것은 풀 하니스 시트벨트로부터 또 다른 즐거움을 얻어내게 될 것이란 가능성이었다. 시트벨트를 양 어깨에 단단히 조여매고 두 팔을 뻗게 하여 ‘롤바’에 묶어놓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 그 상태에서 상대의 무릎 위에 지그시 걸터앉으면 그 즉시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열릴 것이란 판단이었다.

롤바란 자동차가 전복되는 등의 큰 사고에 대비하여 실내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장비를 말한다. 굵은 파이프를 철봉대처럼 구부려 천정을 가로지르고 지지대로 받쳐놓은 형태로서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철봉대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나는 천재야, 천재.’

이런 떡을 할 놈 같으니. 그는 4점식 풀 하니스 시트벨트와 굵은 롤바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잠시 후 강유리와 함께 벌이고야 말 ‘독립만세 형 상열지사’를 꿈꾸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유관순 열사가 만세 부르듯 강유리의 두 팔을 벌려 롤바에 묶어놓고, 양 어깨를 4점식 시트벨트로 조여 놓은 뒤에 하면… 얼마나 좋을까에 관한 망상이었다.

일본 순사가 유관순 열사를 고문하듯, 혹은 변사또가 춘향이를 다그치듯… 협박하고 어르고 달래면서 윗도리 단추를 살살 풀어내는 상황을 떠올리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가곤 했으니, 과연 상열지사 방면의 천재라 할만 했다.

얼마동안 그런 망상에 젖어 있었을까? 벌써 강유리와 통화한 지 두 시간은 족히 지난 모양이었다. 그러니 문득 의심이 들 수밖에. 아무래도 그녀에게 속아서 헛물만 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 아, 그러면 그렇지 제까짓 게…

“많이 늦었지요? 미안해요.”

앙증맞은 폴크스바겐, 소위 딱정벌레로 불리는 차가 날렵하게 피난구역으로 들어서더니 차창너머로 강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여기가 네비게이션에 뜨질 않더라고요. 한참 헤맸지 뭐예요?”

“그랬군요. 차 세우고 어서 이리 들어와요.”

“그래요. 어머나… 이게 말로만 듣던 1974년 산 치타? 껍데기는 엉망이지만 속은 기막히다면서요?”

그녀는 유쾌한 목소리로 재잘거리며 스스럼없이 치타의 코-드라이버 석으로 올라섰다. 며칠 전 요정에서 보았던 해괴망측한 치마 속 정사장면은 벌써 기억에서 훌훌 털어냈다는 듯이 해맑은 표정이었다.

“그럼요. 거성그룹에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인 걸요? 오늘 우리 둘이 함께 타고 신나게 달려보는 거예요. 자 이리 앉아서… 우선 이것부터 매세요.”

마음이 급했기 때문일까? 잠시 그동안의 안부라도 묻고 천천히 시작해도 좋으련만, 그는 다짜고짜 그녀의 양 어깨에 4점식 벨트부터 조여매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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