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80m 이상 무제한급 기계들의 등장 3층건물 높이 ‘트랜스포머’ 로봇과 차별화
오래전 만화로 접했던 수동조종방식 묘미 로보트태권브이 동작 따라하듯 박진감
슈퍼스타된 파일럿·상처 극복하는 인간애… 훈이와 영희가 실존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또 하나의 거대한 로봇이 왔다. 기존 로봇들과는 체급이 좀 다르다. ‘아이언맨’이 라이트급이었고, ‘트랜스포머’가 미들급이었다면, 이번에 찾아온 놈은 헤비급 내지는 무제한급이다. 11일 개봉한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SF 영화 ‘퍼시픽 림’의 ‘예거’다. 독일어로 사냥꾼을 뜻하는 로봇군단 ‘예거(Jaeger)’는 평균 80m 이상, 즉 25층 건물 높이의 신장을 가졌다. ‘트랜스포머’의 로봇들이 약 9m로 3층 높이이기 때문에 일단 규모에서 비교 불가다. 뿐만 아니라 로봇 영화를 유난히 좋아하는 한국 관객들에게 더욱 친숙한 존재로 받아들여질 만한 요소들이 많다. ‘트랜스포머’의 로봇들은 기계였지만, 스스로 사고하고 움직이며 진화하는 생명체였다. 반면 ‘퍼시픽 림’의 예거는 인간이 조종하는 기계다. 일본산 마징가Z나 국산 로보트태권브이가 그랬듯이 말이다.
하나 더, 예거에는 2명의 조종사가 탑승한다. 특히 예거 군단의 주전인 로봇 ‘집시 데인저’는 영화 후반부에서 남녀가 짝을 이뤄 조종하는 것으로 설정됐다. 로보트태권브이의 남녀 주인공 훈이와 영희, 마징가Z의 남녀 주인공 ‘쇠돌이’와 ‘애리’(한국 TV 방영 시 번안호칭)와 같은 구도가 완성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거의 시스템은 조종사 2명의 뇌와 접속이 된다. 조종사가 스틱이나 버튼 등의 장치를 움직여 로봇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예거의 네트워크에 접속한 조종사의 동작을 기계가 그대로 따라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이러한 조종, 접속방식을 ‘드리프트’라고 칭한다. 이름은 거창하게 붙었지만, 따지고 보면 ‘로보트태권브이’가 훈이의 태권동작을 따라하는 방식과 원리가 똑같다.
‘퍼시픽 림’은 공개 전부터 미국 언론을 비롯한 세계 영화계의 기대를 받았던 작품. 일부 매체에선 ‘트랜스포머+고질라+길예르모 스타일’이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그 이상이었다. 예거는 트랜스포머의 한계를 간단히 뛰어넘었고, 지구를 위협하는 괴물 ‘카이주’는 고질라를 차라리 애완용으로 보이게 했으며 ‘길예르모 스타일’은 영상과 이야기에 이전의 로봇영화에선 볼 수 없는 깊이와 풍요로움을 가져다 줬다.
2020년대가 배경이다. 일본 태평양 연안의 심해에 커다란 균열이 일어나고 이곳에서 엄청난 크기의 외계 괴물 ‘카이주’가 나타난다. ‘에일리언’의 무시무시한 이빨과 거대 공룡의 몸체, 익룡의 날개, 어룡의 아가미 등 모든 파충류풍 괴물의 형상을 합쳐놓고 잔혹함을 진화시킨 듯한 생명체다. 카이주들은 일본을 시작으로 미국, 중국, 러시아, 호주 등을 무차별 공격해 초토화시킨다. 인류는 범태평양연합군을 창설하고, 거대 로봇군단 예거를 개발해 카이주와의 전쟁에 나선다.
전쟁에 접어든 몇 년째. 예거는 카이주와의 대결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 시작하고, 파일럿들은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슈퍼스타가 된다. 카이주는 장난감으로 만들어져 날개돋친 듯 팔리고, 카이주의 장기는 정력제로 밀거래되는 시대가 된다. 평범한 청년이었던 ‘롤리’(찰리 헌냄)는 남다른 ‘드리프트’ 능력으로 형과 함께 ‘집시 데인저’의 조종사로서 몇 마리의 카이주를 처단하는 혁혁한 공로로 영웅이 된다. 예거는 워낙 규모가 크고 시스템이 복잡해 신경망의 좌반구와 우반구를 담당할 두 명의 조종사가 필요하고 파일럿들끼리는 정신을 공유ㆍ합체해야 한다. 그래서 조종은 부자ㆍ형제 등이 파트너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롤리는 마지막으로 나선 전투에서 카이주의 공격으로 형을 잃고, 간신히 귀환한 뒤 예거의 조종석에서 은퇴해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중 진화를 거듭하며 강력해지는 카이주에 예거가 속수무책이라는 판단하에 범태평양연합군은 로봇군단을 해체하고 해안선을 따라 장벽을 설치하는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카이주는 장벽을 넘어 인류를 재차 공격해오고, 고립된 예거군단은 대장인 스탁커 펜테코스트(아드리스 엘바)의 지휘 아래 최후의 전투에 나선다. 파트너를 잃었던 롤리는 대장의 소환으로 여조종사 마코(키쿠치 린코)와 새롭게 팀을 이뤄 다시 예거에 탑승한다.
카이주의 정체는 뭘까. 영화 후반부에 카이주가 왜 지구를 침략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그것은 인류가 자초한 묵시록이기도 하고, 속편에서 새로운 존재들의 ‘진격’을 예고하는 계시록이기도 하다. 터미네이터와 트랜스포머와 아이언맨 등 숱한 로봇 영화가 있었지만 현재로선 ‘퍼시픽 림’이 그 결정판으로서 앞선 조상들을 뛰어넘는 진화를 보여준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콜로서스’와 조지 웨슬리 벨로의 ‘디 아트 오브 복싱’ 같은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영상은 어두운 채로 화려하고, 수십층 건물 높이의 예거와 카이주의 격투는 속도와 움직임에서 현실감이 넘친다. 진화하고 진격하는 로봇. 한국팬들은 어떻게 화답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