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의 은퇴학교
17살 딸 아이의 생일이다. 아버지 K 씨의 선물은 딸 아이 명의의 은퇴전용 계좌와 펀드투자 계좌다. 이는 미국 부모의 자녀를 위한 재무독립 계획 중 하나다. 미국에서는 세금을 낸 소득만 증빙되면 아이도 은퇴전용 계좌를 열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와 소비에 노출된 아이들에게 노후를 준비하도록 부모가 재무관리 시스템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일찍부터 고령화 시대를 경험한 미국은 자녀와 손주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은퇴전용 계좌를 만들어 주는 것이 유행이다. 시간만큼 확실한 투자가 없다는 말처럼 일찍부터 투자할수록 ‘푼돈’은 ‘큰돈’이 된다. 아이의 40년 뒤를 책임져 주는 콘셉트의 선물인 동시에,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는 부모의 현명한 선택이다.
재테크 열풍이 불었던 2000년 이후 한국의 L 씨도 통장의 사용처를 구분 관리해 오고 있었다. 비상자금, 자녀교육, 결혼 등. 지금 환갑을 맞은 L 씨는 텅 빈 통장에 애가 탄다.
두 아이의 교육과 결혼의 타격이 컸고 퇴직금은 대출금과 생활비로 흐지부지 없어졌다. 금융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합리적인 우선순위에 따라 사용하기보다 급한 일에 쓰고 말았다.
지출관리가 쉽지 않다면 ‘꽉 잠궈 주는 자물쇠 같은 통장’과 같은 은퇴전용 계좌를 권유한다. 은퇴 후에는 자산축적(stock)에서 현금흐름(flow)개념이 더 중요해진다. 각종 연금과 분배형 상품의 이자관리를 일괄적으로 할 수 있고, 수익률까지 우대해 주는 은퇴전용 계좌가 많다. ‘은퇴생활’ 용도에 맞게 안정성과 유동성을 감안한 상품으로 구성돼 투자에 무리수를 두지 않게 한다. 또 은퇴설계를 기반으로 정기적으로 관리해 주기에 안성맞춤이다.
꼼꼼한 신입사원 Y 씨는 입사와 동시에 퇴직을 준비하는 은퇴전용 계좌를 개설했다. 부모가 한 두 해 뒤에 은퇴와 귀촌을 고민하고 있어 미래를 생각하는 기폭제가 됐다. 효율적인 월급관리를 위해 수시 입출금이 가능하면서 연 2%대의 CMA-RP, 재형저축은 기본이고, 은퇴전용 계좌에 개인연금까지 담았다. 월급관리를 투자와 은퇴를 위한 자산관리로 양분화시킨 것이다.
40대 후반 골드미스 J 씨도 노후 준비를 다짐했다. 부모도 언젠가는 돌아가실 것이고, 남자와의 결혼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은퇴전용 계좌에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을 한곳에서 입금관리하고 월 지급 이자까지 모아 재투자가 가능하도록 설계할 예정이다. 은퇴설계를 통해 부족한 자산도 명확하게 보여 축적하는 것이 수월해질 것 같다.
저성장, 저금리, 고령화 시대를 맞아 옛 방식의 자산관리가 여전히 통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요즘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어도 김치와 과일 맛을 지켜 주는 김치냉장고가 필수다. 와인 마니아는 소중한 와인을 보관하기 위해 와인셀러를 산다. 100세를 살아도 거뜬하도록 잠궈 주고 정기적으로 관리ㆍ설계가 가능한 은퇴전용 계좌, 시대에 맞는 자산관리법을 다시 생각할 때다.
삼성증권 은퇴설계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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