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의 뫼비우스

외도·근친상간·거세 등 자극적인 영상 성기로 이어진 한 가족의 불편한 욕망 김기덕 감독 위태위태한 20번째 연출작 원초적 폭력 가득한 과거작품으로 회귀 신랄한 클로즈업…객석은 의문속으로

작가주의일까, 센세이셔널리즘일까? 김기덕 감독의 20번째 영화 ‘뫼비우스’는 그 경계에 위태하고 불온하게 걸쳐져 있다. 성기가 절단되고, 성적 희열을 위해 신체가 훼손된다. 아버지의 성기가 아들에게 이식되고, 부자(父子)가 같은 여자를 탐하며, 모자(母子)가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 대부분의 장면이 ‘근경’(近景)으로 스크린에 담긴다. 웬만큼 단련된 영화전문가도, 김기덕 영화의 팬이라도, 시각과 청각의 한계를 넘나들며 스크린에서 엄습해들어오는 감각의 무자비한 공세를 당해내기가 어렵다.

때로 불편함과 불쾌함의 정도가 ‘고문’ 수준으로 치닫는다. 이만하면 말초적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객석을 ‘충격’으로 몰아가는 전략은 가히 성공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센세이셔널리즘을 통해 관객을 반성과 구원의 상상력으로 안내하는가? 오히려 세상을 근심하고 구원을 고민하는 거장 영화작가의 의도가 시각적 폭력 속에서 유린당하는 것이 아닐까? 김기덕의 신작은 객석을 의문 속으로 몰아간다.

불편함을 감내하고 영화를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자. 남자(조재현 분)는 골프채로 스윙을 연습하고 여자(이은우)는 와인을 마시며, 아들(서영주)은 교복을 입고 있는 대한민국 중산층의 가정이다. 남편 휴대폰의 벨이 울리고, 머리를 산발한 여자가 다짜고짜 뺏어든다. 아들이 보는 가운데 서로 휴대폰을 가지려 그악한 육탄전을 벌이고, 힘으로 아내를 제압한 남편은 통화한 후 집을 나선다. 외도다. 그는 길모퉁이 허름한 구멍가게의 젊은 여인(이은우)과 차 안에서 질펀한 정사를 벌인다. 아버지의 불륜을 아들이 훔쳐보고, 아버지의 엇나간 욕망을 지켜보는 아들을 아내가 목격한다. 눈밝은 관객은 아내와 가게의 젊은 여인이 묘하게 닮았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같은 여배우다. 이은우의 1인 2역이다. 시선이 겹치고 욕망이 얽혀들며 이룬 한 가족의 기묘한 ‘뫼비우스의 띠’다.

분노한 여자는 칼을 들고 남편의 성기를 자르겠다고 달려들지만 실패한다. 대신 아들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려 한다. 결국 아들의 육체는 훼손당하고, 자신 때문에 벌어진 비극에 아버지는 절망한다. 결국 스스로 눈을 찌른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는 자신의 몸을 베어냄으로써 속죄하려 한다.

띠를 한번 꼬아붙여 안팎의 경계를 없애는 ‘뫼비우스’ 놀이는 계속된다. 아들은 성기를 잃었지만 아버지의 불륜 상대를 찾아가 금단의 쾌락을 욕망한다. 스스로 거세한 아버지는 불구가 된 아들의 성(性)을 찾아내려 온갖 방법을 시도하는 한편, 스스로는 거세된 몸을 위한 새로운 욕망의 샘을 ‘자해’에서 발견한다. 결국 아들의 몸엔 아버지의 성기가 이식되고, 한 가족이 이룬 욕망과 쾌락의 ‘뫼비우스의 띠’는 순환을 계속하다 어느 지점에서 비극적인 끝을 본다.

김기덕 감독의 세계에서 한동안 바깥으로 밀려났던 폭력과 강간, 자학, 살인, 신체 훼손의 기괴한 세계가 다시 중심으로 돌아왔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한발 떨어져 아름다운 사계 속 인간사의 불교적 순환을 그려내며 절정을 이뤘던 ‘원경(遠景)의 상상력’ 대신 위악적이고 신랄한 클로즈업의 고통이 스크린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신체를 해하는 ‘섬’, 여인이 자신을 겁탈한 남자를 받아들이는(사랑하는) ‘나쁜 남자’, 침묵 속에서 기묘한 삼각관계를 보여준 ‘빈집’, 남편의 외도로 인해 다른 남자를 찾아간 여인의 이야기 ‘숨’, 한 여인이 성형 전후의 자신과 연적관계가 된다는 설정으로 ‘얼굴 바꾸기 놀이’를 보여주는 ‘시간’ 등 김기덕은 자신의 20번째 작품에서 그동안의 전작들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인용하거나 답습한다.

김기덕 감독은 “가족은 무엇인가. 욕망은 무엇인가. 성기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내가 아버지고 어머니가 나고 어머니가 아버지다. 그렇게 우린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로 연결된 것이고 결국 내가 나를 질투하고 증오하며 사랑한다”고 ‘작의’를 밝혔다. 김기덕 감독은 일찍이 ‘시간’에서 영화의 처음과 끝을 이어놓음으로써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의 뫼비우스를 보여줬으며, 이번 영화의 성기이식과 비견할 만한 ‘얼굴바꾸기’를 통해 관계와 정체성의 뫼비우스를 극화했다.

한때 화해와 용서의 정조가 숨을 쉬던 김기덕의 스크린은 다시 한번 원초적 폭력과 위악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김기덕의 과거와 현재는 뫼비우스의 띠가 된다. ‘뫼비우스’에서 성기는 구체이면서 추상이고 물질이면서 상징이다. 김기덕 특유의 남근의 윤리학과 남근의 상상력에서 실재와 상징은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다. 김기덕 감독이 작품 속에서나, 영화계에서나 오로지 충격과 논란을 통해서만 자신의 작가적인 의지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센세이셔널리즘과 작가주의는 다시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김기덕 감독의 섬뜩한 이미지와 논쟁적인 발언은 오히려 그의 작가주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닐까? 20번째 다운 김기덕 세계의 ‘종합’이자 ‘완성’이 아니라 ‘정체’나 ‘퇴행’처럼 보이는 ‘뫼비우스’에 선뜻 엄지손가락을 들 수 없는 이유는 단지, 시각적인 불편함 때문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