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3> 감추어진 승부 (77) 글 채희문 | 그림 현경희

젊고 잘생긴 CF모델 박박진진과 눈먼 사랑에 빠져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던 HY 훌 푸드 신희영 회장은 머나먼 고원지대 티벳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나서야 약간이나마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신비스러운 도시 ‘라사’의 ‘인민병원’에 근무하는 미국인 의사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영어와 한국말을 반반씩 섞어 이야기하던 그는 최근 불어 닥친 한류열풍 때문에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는데, 배운지 불과 반 년 만에 전화통화도 가능해졌다는 자랑부터 늘어놓았다.

“네? 인민병원이라고요? ‘라사’에 있는 인민병원? 혹시 이 전화… 보이스 피싱 아닌가요? 나를 뭘로 보고 그래요? 당장 현금지급기 앞으로 가서 비밀번호부터 찍으라고 하는 수법을 누가 모를 줄 알아?”

“노우, 미세스 신! 여긴 티벳 공안국 PSB 옆에 있는 호스피텔이예여 지금 미세스 신의 아들께서 엔터 호스피텔하셨세여. 그래서 전화 했세여.”

“엔터 호스피텔? 병원에 입원했다고요? 맞아, 그것도 요즘 보이스 피싱에서 사기꾼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야. 아들이 사고로 다쳤으니 쌈짓돈 찾아내서 얼른 부쳐라… 이런단 말씀이지. 당장 끊어, 이 사기꾼아.”

“오우, 노우, 노우! 미세스 신!”

헤럴드 경제 연재소설 <알리바바 傳> 853회;보이스 피싱에 넘어가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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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된 전화통화는 결국 진지하게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라사’는 생소한 지명이었지만 히말라야, 네팔, 카트만두, 고비사막까지 들먹이는 장황한 설명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미국인 의사는 정체를 의심하는 신희영을 납득시키기 위하여 인근의 지명부터 차례로 들추어가며 설명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정말로 내 아들 유호성이 인민병원에 입원해 있다고요? 좋아요, 그럼 마지막으로 확인해 볼게요. 당장 고개 돌려서 창문너머로 보이는 것들을 일일이 불러보세요. 내가 그 근처 지리에 환하거든요?”

대개 보이스 피싱이 지하실 골방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긴 신희영은 미국인 의사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만약에 상대가 지하실 골방에 있다면 기껏해야 회칠 한 벽이 보일 뿐일 테고, 자연히 질문의 답을 더듬게 될 것이 빤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근처 지리에 환하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스트 쪽으로 라모체 신전이 보이네여. 또… 웨스트로는 루캉 사원이 보이고여, 싸우스 방면으로는 팔하루푹 사원이 보이네여. 물론 그 사이에 미니버스 스탑과 백화점, 호텔도 보이네여. 됐세여? 댓츠 오케이?”

사실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말하는 본새로 보아 그 미국인 의사라는 사람이 말짱 사기꾼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문의 기둥인 아들 유호성이 입원하다니, 그것도 생전 가본 적도 없는 어디서? 티벳? 라사?

“이걸 어째요? 많이 다쳤나요? 죽지는 않았지요? 자동차 경주에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해도 듣지 않더니 기어이 일을 저질렀군요. 아이고, 난 몰라!”

신희영은 전화기를 부여잡고 하마터면 징징 울 뻔 했다. 그러나 건너편 미국인 의사는 전혀 다급한 기색이 없었다.

“그룹 히스테리는 다칠 염려도 없고, 죽을 염려도 없세여. 씽킹! 씽킹! 생각 좀 해보세여, 게이들과 섞여서 그룹섹스 한다고 죽나여? 다치나여?”

이게 도대체 뭔 소리지? 신희영은 도무지 미국인 의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룹 히스테리가 뭔 말인지, 뜬금없이 그룹섹스는 어째서 들먹이는지, 아들 유호성이 무슨 사연으로 히스테리를 부린다는 것인지…

“아니, 의사양반! 히스테리는 시집 못 간 노처녀가 부리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대꾸했지만 마음은 벌써 ‘라사’의 인민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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