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1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22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지난밤을 길에서 꼬박 새운 유한솜과 권일주는 구경꾼들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맨 앞이기도 했지만 조선중앙 TV의 중계 카메라 바로 옆자리이기도 해서 역사적인 현장을 목격하기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아버님, 이제 저 클래식 카 행렬이 지나가면 머잖아 랠리 카들이 들이닥칠 거예요. 본격적으로 경기가 벌어지는 거지요. 그 맨 선두에 권도일 씨나 호성 오빠가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야지 아무렴. 하지만 세상일은 알 수 없어. 네 오빠 호성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너무 실망하면 안 된다.”
“불길하게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는 믿어요. 필시 두 사람이 선두 다툼을 하면서 저 다리 입구로 들어설 거예요.”
하지만 유한솜과 권일주가 가장 먼저 목격하게 된 모습은 세상에… 웃을 수도 없고, 놀랄 수도 없는 해괴한 퍼포먼스였다. 세기의 보물로 일컬어지는 클래식 카의 행렬을 멋지게 추월해가며 선두로 치고 들어오는 영업용 택시들이 무려 넉 대나 되었는데….
“아니, 저게 무슨 일이냐? 저건… 중국 영업용 택시들 아니냐?”
“어머머… 영업용 택시들이 퍼레이드 행렬을 막아섰어요. 그뿐이 아니네요. 웬 사람들이… 어머, 저 사람은 골프 선수 강유리예요.”
유한솜은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이 이어지고 있었다. 강유리 선수가 웬 서양 늙은이와 함께 퍼레이드 선두 차에 헐레벌떡 올라서는 것까지는 그나마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네 번째로 치고 들어온 영업용 택시에서 허겁지겁 뛰어내린 사람… 그 남자는… 바로 그녀의 오빠 유호성임에 틀림없었다.
권일주도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죽어서 모래 속에 파묻혀 있거나, 목숨을 부지했다 치더라도 다리몽둥이가 부러져 절룩거려야만 할 유호성이, 물찬 제비처럼 날래게 강유리 선수의 뒤를 쫓아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중계석의 아나운서들이 호들갑을 떠는 모습으로 보나, 관중이 떼 지어 야유를 보내는 것으로 보나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임에 확실했다.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잠시 후, 돌발적으로 정지한 퍼레이드 행렬 선두 차량의 지붕을 밝고 강유리 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우성치던 관중이나 마이크 앞에서 호들갑을 떨던 아나운서들도 일순 입을 다물었고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렛미 씨 유 골프 쇼! 브라보 골프! 원더풀 골프!”
강유리는 어느새 비키니 차림이었다. 선두를 달리던 1928년형 ‘메르세데스 벤츠 680S’ 차량의 내부에도 골프채를 미리 준비해두었던 것일까? 만세 부르듯 번쩍 치켜올린 그녀의 한 손에도 어느새 번쩍이는 골프채가 들려 있었다.
뜻하지 않게도 군중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이 일시에 쳐대는 박수소리는 고막이 멍멍해질 정도였다. 분위기는 다시 반전되었고 그 위세에 눌린 아나운서들은 또다시 흥분하며 마이크에 대고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때, 자동차의 열린 창문틀을 밟고 지붕으로 엉금엉금 기어올라오는 남자… 바로 유호성 선수였다. 그는 차량에 연결된 확성장치를 통해 잠시 전, 강유리가 외쳤던 구호를 따라서 열창했다. 브라보 골프! 원더풀 골프!
유호성의 손에는 주둥이가 가늘고 좁은 유리병이 들려 있었고, 그 유리병 위엔 골프공 하나가 앙증맞게 올려져 있었다. 유호성은 그 공이 굴러 내리지 않도록 강유리 선수의 엉덩이 뒤에 조심스럽게 주저앉더니, 결국 납작 엎드려서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공을 들이밀었다. 이를테면 강유리 선수가 티업할 수 있도록 티 역할을 대신한 셈이었다.
“따악!”
강유리는 주저 없이 공을 날렸고, 유한솜과 권일주는 약속한 듯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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