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진 자택 앞 확성기 집회에 주민 불편

보수단체 광고주 상대 계약 해지·불매 예고

장관 고소까지 번지며 표현의 자유 논란

지난 9월 유해진 씨가 영화 ‘암살자(들)’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모습. [헤럴드뮤즈]
지난 9월 유해진 씨가 영화 ‘암살자(들)’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모습. [헤럴드뮤즈]

[헤럴드경제=정주원 기자] 6일 오전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유해진 씨의 자택 앞에는 이틀 전 수십명이 모여 확성기로 구호를 외쳤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집 앞 골목은 오가는 사람 없이 한산했고 이날 집회를 나온 사람도 없었다. 지난 4일 가장 시끄러웠던 집회는 전날 오전까지 짧게 이어진 뒤 사실상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하지만 주민들에게는 당시 소음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자택 인근에서 만난 한 주민은 “그제 오후가 매우 시끄러웠다. 몇십 명이 왔다 갔다 했다”며 “계속 스피커와 확성기로 얘기했다”고 회상했다.

영화 ‘암살자(들)’의 역사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주연 배우의 집 앞까지 번지며 일부 보수단체는 유해진 씨의 자택을 시작으로 광고주와 영화 제작사까지 항의 대상을 넓혀가고 있다. 반면 영화계는 작품에 대한 비판을 넘어 출연 배우 개인의 주거지까지 찾아가는 방식이 창작·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며 우려한다.

조용한 주택가 덮친 집회 소음

보수단체 신자유연대는 지난 4일 오후 이곳에서 ‘암살자(들)’ 제작사와 배우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경찰 비공식 추산 50여명이 참석한 해당 집회에 앞서서도 해당 단체는 이달 3일부터 30일까지 매일 20명 규모로 집회를 열겠다고 신고했다.

영화는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다. 신자유연대를 비롯한 보수단체들은 영화가 당시 사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중앙정보부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암시했다며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제작진은 특정한 역사적 결론을 새롭게 확정하거나 기존 사실을 부정·왜곡하려는 영화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집회가 열린 곳은 경사진 도로를 따라 단독주택과 공동주택이 자리한 주택가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주민들은 평소에도 인근에 기업인 등의 자택이 있어 노조 집회 등을 접하는 일이 있지만 이번 집회는 성격이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6일 오전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배우 유해진 씨의 자택 앞 모습. 지난 4일 이 곳에서 보수단체가 참여한 집회가 열렸다. 정주원 기자
6일 오전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배우 유해진 씨의 자택 앞 모습. 지난 4일 이 곳에서 보수단체가 참여한 집회가 열렸다. 정주원 기자

이 일대에서 약 30년을 살았다는 주민 이모(65) 씨는 “주변에 기업 회장들이 살다 보니 노조에서 나와 집회하는 것은 종종 봤다”면서도 “그런 경우는 서로 이해관계가 있으니까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화에 문제가 있다면 제작사나 감독에게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배우가 무슨 죄가 있느냐. 배우는 직업으로 연기한 것 아니냐”고 했다.

실제 신자유연대도 유해진 자택 앞 집회는 더 이상 이어가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신자유연대 관계자는 “유해진씨 집 앞에서 집회하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며 “상징적으로 한 번이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주택가이고 경사진 곳이라 집회 장소로도 별로 좋지 않다”며 앞으로는 기업 등을 상대로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자택 앞에서 시작된 항의는 제작사와 광고주로 옮겨갔다. 호국연합방패단은 하이브미디어코프 앞에서 제작진과 배우를 규탄하는 집회를, 신자유연대와 벨라도는 각각 유해진 등 출연 배우의 광고 계약 해지를 요구하는 집회를 예고했다.

신자유연대 측은 광고가 내려가는 데 그치지 않고 모델 계약 자체를 해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당 관계자는 “모델 계약 자체를 해지해 달라는 것”이라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불매운동도 벌이겠다고 예고했다.

‘신변 위협’ 공방에 영화계도 우려

자택 앞 집회를 두고 정부까지 공개 비판에 나서면서 갈등은 한층 커졌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5일 “영화에 대한 평가는 자유이지만 창작자에 대한 신변 위협은 민주주의의 파괴”라며 경찰청 등 관계 당국에 영화 관계자와 배우의 안전 조치 및 불법 행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을 요청했다.

경찰도 실제 위해나 협박 행위가 확인되면 엄정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고범석 서울경찰청장은 이날 정례간담회에서 “배우에 대한 위해나 협박 같은 부분은 당연히 법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배우나 소속사 측의 신변보호 요청은 없지만 필요할 경우 순찰 강화나 신변보호 조치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7월 국회에서 열린 대한축구협회 현안 관련 청문회에서 업무보고를 하는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7월 국회에서 열린 대한축구협회 현안 관련 청문회에서 업무보고를 하는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한편 신자유연대는 이날 오전 서울지방중대범죄수사청에서 최 장관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단체가 이날 배포한 의견문에는 “헌법에 보장된 집회의 자유 및 집시법에 근거해 평화로운 규탄 집회를 진행했고 유해진은 자택에 있지도 않은 상태였다”며 “유해진에 대한 위협·협박을 한 바가 없다”는 내용이 담겼다.

신자유연대 측은 “문체부 장관이 나설 일인가”라며 “나서려면 사실관계부터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반대로 소속사 측은 배우를 향한 비방과 허위사실 유포 등에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소속사는 관련 게시물과 자료를 수집하고 있으며 배우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신변을 위협하는 행위에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영화계도 작품에 대한 비판과 배우 개인을 향한 공격은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영화인연대 관계자는 “영화에 대한 논의가 개인의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큰 입장”이라며 “작품의 역사적인 해석 자체를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위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인연대는 별도의 대응 전담반(TF)을 꾸리고 제작사 관계자와 후속 대응을 논의하고 있다.

지난 4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배우 유해진 씨 자택 앞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제작사와 배우를 규탄하는 집회를 하는 모습. [연합]
지난 4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배우 유해진 씨 자택 앞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제작사와 배우를 규탄하는 집회를 하는 모습. [연합]

류재현 문화기획자는 “배우는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갖고 비난한다면 어떤 배우가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며 “작품은 작품으로, 배우는 배우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치적인 논리에 빠지지 않고 서로 존중했으면 좋겠다”며 “영화를 넘어 배우 개인까지 판단하는 것은 성숙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도 “특정 배우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작품 자체를 놓고 이야기해야지 배우가 맡은 역할 때문에 항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 평론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며 “영화에 바람직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의견을 표현하면 되는 것이지 특정 배우를 압박하거나 작품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jookapooka@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