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교황 다음의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추기경의 진홍색 주게토(Zucchettoㆍ사제가 쓰는 둥근 모자). 지난 2011년 정진석(83)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은퇴 이후 새로움 추기경의 서임이 없었다. 한국은 536만 명의 신자(2012년 말 기준)를 보유하고 있고, 세계에서 드물게 꾸준히 신자가 증가하고 있는 나라다. 또한 한국은 아시아에서 교황청에 가장 많은 재정분담금을 내고 있다. 그런 만큼 교계에선 새로운 추기경 서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마침내 2년의 공백이 깨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2일 발표한 새로운 추기경 19명 명단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71) 대주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로써 염 추기경은 한국 세 번째 진홍색 주게토의 주인공이라는 영광을 안았다. 또한 염 추기경은 80세 이하여서 콘클라베(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단의 선거회)에도 참석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게 됐다.
염 추기경을 서임한 프란체스코 교황은 역사상 최초의 남미 출신 교황이다. 따라서 유럽 중심이던 가톨릭 고위직이 비유럽권 성직자들에게도 폭넓게 개방될 것이라고 예측돼왔다. 실제로 새로운 추기경 서임 명단에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 부르키나파소를 비롯해 중남미의 아이티, 칠레 등 다양한 지역 출신 성직자들이 이름을 올렸다. 페데리코 롬바르디 바티칸 대변인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아이티와 부르키나파소 출신 성직자를 추기경으로 임명한 것은 빈곤에 대한 관심이 교회의 핵심 사명이라는 교황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 달 22일 로마 바티칸에서 서임식을 열 예정이다.
한국에서 진홍색 주게토는 종교적 의미를 넘어 고(故) 김수환 추기경 이래 현대사에서 소외되고 부당하게 탄압받는 사람들의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져 왔다. 이는 그가 단순히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넘어 민주화, 인권 등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은 민청학련 사건, 6ㆍ10 민주항쟁 등 70~80년대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최전선에 서서 약자들을 위무하며 국민의 정신적 멘토로 존경을 받았다. 많은 국민들이 범종교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추기경 서임을 손꼽아 기다린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염 추기경은 정치적으로 중도 내지 보수 성향을 보여 왔다. 그는 지난해 11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미사 강론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 발언에 대해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사제들이 정치ㆍ사회적으로 직접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며 비판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추기경 서임이 한국에 어떤 정치ㆍ사회적 영향을 미치게 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