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은 국가기관 아니다” 주장
‘정부 지급보증 불가’ 사실상 재확인
중재재판부서 인정 안돼…배상책임
청구액 7% 인정도 오류, 실제는 14%
유사한 메이슨 소송서도 패배 확실시
부당한 영향력·가해 이득자 등 확인
국내법 적용하면 구상권 청구할수도
현대의 사법체계를 크게 둘로 나누면 영미법과 대륙법이다. 영미법은 13세기 영국의 대헌장(大憲章, Magna Carta )이 기초다. 대륙법은 고대 로마법을 이어받아 근대에 나폴레옹 법전으로 집대성된다. 두 법 체계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특히 국가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
영미법은 국가(국왕)도 국민 개개인과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 대륙법은 국가는 국민 개개인과 다른 특별한 존재다. 국가가 잘못을 해도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이를 따질 수 없다. 그래서 행정소송이 별도로 필요하다. 우리나라 법은 일본의 법을 기초로 했다. 일본 법은 프로이센의 대륙법이 모델이다.
각국의 법 체제는 독립적이다. 조약 등으로 국제법과 연결되기도 한다. 자유무역협정(FTA)도 그 중 하나다. 우리 국민은 국가가 잘못을 해도 이를 따지기 어렵지만 다른 법체계를 적용받는 해외 투자자들은 우리 정부를 상대로 잘못을 지적하고 손해배상도 요구할 수 있다.
엘리엇어쏘시어츠엘.피.(이하 EALP)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진 행위을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S)에 호소했다.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결과 합병이 성사돼 투자자인 EALP가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이다.
쟁점은 두 가지다. 부당한 영향력이 존재했는지, 그로 인한 국민연금의 행위가 ELAP에 직접 피해를 입혔는지 여부다. 우리 정부는 둘 모두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연금이 정당하게 의사결정을 했다면 그 결과로 인해 다른 주주들이 입은 손실을 보전할 이유가 없다.
앞서 우리나라 대법원은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하는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와 승인 등 부당한 영향력이 존재했다고 인정했다. 부당한 행위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가해자가 배상을 하는게 법의 큰 원칙이다. ELAP가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승소한 이유다.
‘부당한 영향력’으로 인한 국민연금의 결정으로 정부가 1300억원에 달하는 혈세가 지출된 데 대한 구상권 청구 등 후속 조치가 필요하게 됐다. 손해를 본 측이 있다면 이익을 본 측이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번 소송 과정에서 드러난 또다른 중요한 문제와 연결된다.
현행법 상 정부는 공무원연금·군인연금·사학연금에 대해서는 연금지급 의무를 갖는다. 이들 연금이 고갈되면 예산으로 부족분을 메워주는 구조다. 국민연금에 대해서도 정부에 이같은 의무를 부여해야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지만 관련법 개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이번 소송에서도 국민연금은 법률상 또는 사실상 국가기관이 아니며, 이에따라 국민연금의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정부가 질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이쯤 되면 국민연금이 고갈 등의 문제로 연금급여 지급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정부는 책임지지 않을 것이 분명해졌다.
PCA의 중재 판결은 정부와 ELAP 사이에만 적용된다. 정부 주장대로면 국내법을 적용해 부당한 결정으로 국가에 손해를 입힌 국민연금에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잘못된 의사결정을 한 연금공단 내 당사자들에게 배임의 책임도 물을 수도 있다. 과연 이같은 조치가 이뤄질까?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를 배신(背信)이라고 한다. ‘저버리다’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나 의리를 잊거나 어기는 행위, 남이 바라는 바를 거절하는 행위를 뜻한다. 법으로 가입을 강제시키고 국민이 낸 돈을 관리하는 공단까지 맘대로 주무르지만 잘못에 책임은 끝내 지지 않겠다면 ‘배신’이다.
ELAP가 청구한 액수는 손해배상과 지연이자 등을 합해 7억7000만 달러다. 이번 PCA 판결로 정부가 ELAP에 지급할 액수가 소송가액의 7%에 불과해 선방했다는 평가가 있다. 따져 보자.
ELAP가 애초 추정한 투자손실은 490억원이다. 이에 더해 합병이 무산됐다면 주가가 더 올랐을 것이라는 가정으로 손해배상 청구액을 부풀렸다. 다 못 받을 줄 알면서도 일단 청구액을 부불리는 것은 이런 종류의 소송에서 흔한 전략이다. 한국 정부는 손해배상 책임 자체를 부인하다 뒤늦게 서울고등법원이 정한 기준으로 약 600억원의 손실은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밝힌다. 중재결정 액수(690억원)는 이보다 더 컸다.
부대 조건도 중재 재판부는 일방적으로 ELAP 손을 들어줬다. ELAP는 연복리 5%의 지연이자와 달러화 기준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연 5% 보다 낮은 시장이자율을 단리로 적용하는 지연이자와 환율상승으로 인한 부담을 피할 수 있는 원화 기준을 주장했다. 결정은 연5% 복리, 달러기준이다. 소송비용 차이는 누가 승자인 지를 추정할 수 있는 간접 지표다. 우리가 줄 액수(372.5억원)가 ELAP에서 받을 금액(44.5억원)의 8배가 넘는다.
‘7% 선방론’도 사실과 다르다. 법무부는 지난 20일 사건 중재판정부가 우리 정부에 5358만6931달러(약 690억원·달러당 1,288원 기준)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ELAP의 청구액 7억7000만 달러의 7%만 인용됐다고 설명했다.
2022년 5월 18일 엘리엇이 PCA에 제출한 청구인 심리 후 답변서를 보면 청구액은 투자손해 4억825만 달러, 지연이자 2억663만 달러 등 모두 6억1409만 달러다. 중재 절차비용은 실비 청구했다.
4억825만 달러를 청구했는데 5358만 달러가 인용됐으면 14%다. 청구액은 총액으로 잡았으면서 지급액은 투자손해액만 계산해 14%가 7%로 됐다.
ELAP와 같은 내용의 소송을 미국의 메이슨캐피탈도 같은 해(2018년)에 제기해 곧 판결이 나온다.동일한 사안이어서 같은 판결이 나올 확률이 아주 높다. 혈세로 물어줘야 할 돈이 더 늘어날 듯 하다. 중재 판결문이 공개돼 봐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정부가 국민연금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며 국민까지 배신했지만 결국 이룬 것은 사실상 완벽에 가까운 패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