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스타부터 대선 후보까지 입어

급변하는 시대와의 절묘한 타이밍

더 다양한 분야로 나아가고 있어

디자이너 김리을이 22일 오전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튜디오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디자이너 김리을이 22일 오전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튜디오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세계적인 그룹 방탄소년단(BTS), ‘트렌드 아이콘’ 지코, 20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까지.... 7년 간 무려 400벌의 한복 정장을 만들었다. 단 한 벌도 가격을 매겨 판매한 적이 없는 데도, 전 세계 7000만 명(BTS의 ‘아이돌’ 경복궁 무대 유튜브 조회수)이 그의 옷을 기억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얼굴’들이 그의 옷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BTS와 대선 후보, 슈퍼카 브랜드 맥라렌이 러브콜을 보내는 디자이너 김리을(29·본명 김종원)이다.

김리을의 이름이 세계로 나온 그는 종종 외국인에게 ‘숫자 2’냐고 질문을 받았다. 훈민정음의 네 번째 자음 ‘리을’을 ‘새 이름’으로 삼은 이 디자이너는 처음엔 다소 생경했지만, 지금은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아시아 30세 이하 30대 리더(Forbes 30 Under 30 Asia 2023)에 들 정도로 유명했다. 포브스는 김리을에 대해 “한국의 전통 예술과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접목해 유행을 만들었다”고 선정 배경을 밝혔다.

그와 함께 이름을 올린 사람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전 세계를 강타”(뉴욕 타임즈)하며 K-걸그룹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뉴진스와 르세라핌, 미국 반 클라이번 콩쿠르 사상 ‘최연소 우승자’로 이름을 올린 K-클래식 스타 임윤찬이 있다. 최근 서울 용산 헤럴드스퀘어에서 만난 그는 “분야가 달라서 함께 오른 지 몰랐다”며 멋쩍게 웃었다.

“운이 좋게도 함께 선정됐지만, 사실 어떤 소감을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살듯 저 역시 제게 주어진 삶을 사는 거니까요. 전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을 디자인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전,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저의 방식으로 디자인하는 시기예요.”

▶BTS부터 대통령 후보까지...문화 입은 한복= “이게 한복 맞아?”

김리을의 손을 탄 ‘21세기 한복’은 ‘전통의 통념’을 넘어섰다. 우아한 곡선은 사라지고, 세련된 직선이 자리했다. 전통 의상에 현재가 내려앉아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 한복 정장을 만들려고 했을 당시엔 한복 정장이라는 개념도 용어도 없었어요.”

익숙하나 낯선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매료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김리을의 ‘한복 정장’은 전통의 미학에 균열을 냈다. ‘오늘의 전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김리을이 지킨 것은 ‘한복의 원단’이다.

“제가 생각하는 한복에는 원단의 멋과 라인의 멋이 있어요. 한복 정장은 양반들의 옷에 쓰던 고급스러운 비단 원단을 가져와 저만의 시각과 방식으로 디자인한 거예요.”

그는 남원에서 나고 자라 전주 한옥마을의 성장을 지켜봤다. 이곳을 오가는 관광객을 통해 K-컬처의 태동을 포착했다. 20대 초반의 김리을이 본 ‘한복’엔 가능성과 한계가 있었다. 외국인의 눈에는 “한복의 원단이 너무도 아름다운” 옷이었지만, 우리에겐 “너무 불편해 선택받지 않는” 옷이었다. ‘요즘 한복’이 태어난 계기였다.

자본금 30만원으로 그는 한복 정장 디자인에 뛰어들었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기에 수월할 리 없었다. 롤모델도 찾을 수도 없어, 그는 스스로 이정표가 됐다. 난관이 많았다. 모두가 부정적이었다. ‘한복의 소재’로는 양장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고, 한복의 ‘평면 재단’은 양장에 맞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전국을 발로 뛰며 ‘김리을표 원단’을 찾았고, 한복 명장들을 찾아 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사실 전 새로운 것을 개발한 사람은 아니에요. 남들이 쓰지 않던 것, 이미 있었던 것을 찾아 저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거죠. 지금의 시스루 원단도 한복이 원조였어요. 그런 것을 찾아낸 거예요.”

한복의 소재를 고수하되 세련된 정장으로, 미니스커트로, 라이더 재킷으로 태어난 옷들은 ‘조선의 힙’을 보여줬다. 2016년 태어난 ‘첫 한복 정장’은 시작부터 ‘대박의 기운’이 따라왔다. 역시나 ‘대성공’이었다.

이태원 거리에서 지나가던 모델을 섭외해 찍은 사진 한 장이 지금의 ‘스타 디자이너’의 탄생을 알렸다. 트렌디한 한복 재킷을 입히고, ‘K-템’으로 불리는 갓을 씌웠다. 거기에 곰방대까지 물리니 패션지가 따로 없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평정한 이 사진을 계기로 뉴발란스를 비롯한 수많은 브랜드에서 마케팅 제안이 들어왔다. 2020년 BTS가 경복궁 근정전에서 김리을의 옷을 입고 선보인 ‘아이돌’(IDOL) 무대는 새로운 패션이자 문화의 증명이었다. ‘청바지와 스커트에도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요즘 옷이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추진한 결과다.

디자이너로 협업 사례가 쌓이며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리을(ㄹ)’을 만들었다. ‘리을’의 슬로건은 ‘한복에 문화를 입히다’로 정했다. 브랜드의 정체성은 로고 디자인에도 담겼다. 정사각형 네모 안에 ‘ㄹ’을 채운 형태다.

“네모난 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에요. 그 안에서 자기의 방식과 개성을 가지고 표현하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브랜드라는 철학을 담았어요.”

▶한복 넘어 식음료, 주거까지...“문화를 바꾸는 일”=그의 한복 정장은 BTS를 비롯해 ‘트로트의 민족’, ‘풍류대장’ 등 각종 TV 프로그램을 섭렵했다. 지난해엔 한국오픈 골프선수권대회 우승 재킷 제작도 함께 했다. 한복 재킷에 수막새 단추로 포인트를 줬다. 단지 옷을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고수해온 “문화를 바꾸는 일”이었다.

“우리나라가 골프 강국이잖아요. 해외 골프 대회에선 우승을 하면 초록색 재킷을 주는데, 한국의 대회에서도 그 재킷을 주는 것이 의아했어요. 우리 대회에선 우리의 멋을 살린 한복 정장을 주면 어떨까 싶었어요.”

‘디자이너 김리을’의 시작은 ‘한복’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한복 디자이너가 아니다”고 말한다. 김리을은 “지난 7년 간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리을의 한복 정장을 입어 브랜드 정체성도 많이 알려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만큼 리을의 영역도 빠르게 확장했다. 슈퍼카 맥라렌에 한국 전통 수묵화를 그린 GT 아트카를 디자인을 했고, 전국 세 개 리조트와 호텔에서 BTS의 한복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대우건설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게소’ 건축도 진행 중이다. 그는 “사방이 바다인 가덕도의 자연 경관을 살린 휴게소”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유현준 홍익대 교수와의 협업 프로젝트다. 뿐만 아니라 막걸리 장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만 나는 물과 쌀로 만든 막걸리의 출시도 앞두고 있다.

식음료부터 건축까지 아우르며 생활 문화 전반에 ‘리을’을 입혀가는 그는 “리을이라는 IP(지적재산권)로 자연스럽게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고 말했다. 경계 없는 행보 안에서 가장 중심에 두는 것은 바로 ‘한국의 문화’다. 스스로를 부르는 직업 역시 디자이너가 아니라 ‘문화 기획자’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좋아해요. 처음엔 한복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한복 정장을 디자인하게 된 이후, 국가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릴 적엔 축구를 좋아해 태극마크를 달고 싶었지만,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둔 뒤 찾은 길이 바로 리을이다. 자신의 디자인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국가대표로 만들고 싶었던 바람이 리을에 쌓이며 브랜드는 성장했다.

김리을은 지난 7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20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온 시기”라고 말했다. 세상에 없던 ‘한복 정장’이 나오고, 세계적인 K-팝 스타부터 대선 후보까지 리을의 옷을 입게 된 것에 대해 그는 “급변하는 시대와의 타이밍이 절묘했다”고 봤다.

“리을이라는 브랜드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가질 수 없는 전통과 역사성이라는 가치가 있어요. 어찌보면 이뤄질 수 없던 일들이 시대의 변화로 가능해졌다고 생각해요. 한복 정장으로 이윤 추구를 하지 않았기에, 대선 후보자들이 입을 수 있었고요. 다음 길은 도전이에요. 한복 정장이 전통과 현대를 잇는 첫 번째 표현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더 다양한 분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의 길로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