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문학의 대모’로 불리는 소설가 오정희의 짧은 소설집으로, 다양한 매체에 발표한 42편을 담았다. 40대 전후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은 당시의 생활 풍경과 인물의 내면을 생생하고 섬세하게 그려냈다.

소설집의 제목 ‘활란’은 수록작 ‘사십 세’의 주인공 이름이다. 당당한 여성 선각자로서 지난 세대에 잘 알려진 김활란 박사를 본받으라는 뜻에서 주인공의 부모가 지어준 것이다.

‘활란’의 여성 인물들은 요즘 또래 세대와는 다르다. 그들은 시대의 가부장적 분위기에 반발하지만 그 너머로 나아가진 않는다. 당당함과 새로움, 도전을 꿈꾸지만 오래된 기존의 규율과 가치관이 내면화된 세대이다.

그런 흔들림을 그 자신들이 가장 잘 안다.

‘부부’의 나는 도배를 하다가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남편의 핀잔에 친정집에 가 하소연하는 게 전부다. ‘아들이 좋은 것은’ 의 정임은 노모가 계신 한나절 친정 나들이를 위해 식구들 끼니 챙기기에 진을 빼고 기차 시간에 쫓긴다. 막 나가려던 참에 퇴근한 남편이 내일 결혼식에 가야 한다며 바지와 와이셔츠를 다려달라는데 정임은 울화가 치밀지만 다리미를 꺼내 든다.

‘사십 세’의 주인공 활란은 며칠 전 얘기를 나눈 이웃집 여자가 나이 오십에 돌연사한 데 충격을 받고. 아이 성적에 기분이 달라지고, 끼니때와 반찬 걱정, 아파트 평수를 늘릴 궁리로 세월을 보낸 ‘이것이 나인가’ 회의를 느낀다.

곗돈을 타고 당당한 주부, 며느리의 헤픈 살림이 못마땅한 시어머니, 아내가 자기 삶을 돌아보며 새 계획을 모색할까 좌불안석인 남편, 친구의 독립선언에 귀를 쫑긋 세운 동창 등 시대의 표정이 스냅사진처럼 들어있다.

짧은 소설들은 뻑뻑한 고구마가 얹힌 것처럼 답답함을 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영 다른 나라 얘기만은 아닌, 긴꼬리처럼 이어지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현재성이 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활란/오정희 지음/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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