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어떻게 삶을 파고드는가(폴 콘티 지음, 정지호 옮김, 심심)=가수이자 배우인 레이디가가가 19살 때 성폭행을 당해 정신착란까지 겪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2017년 월드투어 중이었던 레이디가가는 극심한 신체적 고통과 정신착란으로 뉴욕의 개인병원 응급실로 실려왔다. 레이디가가의 표면적 질병은 섬유근육통이었지만 의사는 트라우마에 주목했다. 당시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치유와 회복, 새 삶을 선사한 이가 하버드 의대 교수를 거쳐 20년 넘게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돌본 정신과의사 폴 콘티였다. 폴 콘티는 불안과 우울, 무기력, 자책감, 좌절감, 수치심 등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근저에 트라우마가 있다고 말한다. 트라우마는 바이러스, 기생충, 오염물질과 같다. 그만큼 전염성과 위험성이 높다. 보이지 않는다고 계속 무시하고 방치할 경우 상태는 더 심각해진다. 저자는 특히 트라우마의 공범자로 수치심을 지목한다. 수치심은 절망감과 무력감을 낳으며 가까운 사람들과 멀어지게 만들고, 나아가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와 좌절로 바뀌기도 한다. 그 역시 동생의 자살로 죄책감과 수치심을 경험했다. 저자는 트라우마가 사회에 만연해 있지만 현재의 의료체계는 트라우마 대처에 매우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코로나 19 팬데믹 같은 사회 환경과 인종차별, 불평등 등은 트라우마를 더 부추긴다. 트라우마의 모든 것을 담은 책은 트라우마가 어떻게 우리 뇌와 정서, 기억, 몸을 변화시키는지, 트라우마를 인식하는 능력과 트라우마를 저지하는 방법 등 작동방식과 실용적 조언까지 체계적으로 담아냈다. 특히 저자의 경험과 수많은 사례들이 이해에 도움을 준다.
▶강한 견해(설재인 지음, 아작)=외고 수학교사에서 작가로 변신한 3년차 설재인 작가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아포칼립스 주제의식을 담은 ‘붉은 마스크’의 후속편이자 완결판이다. ‘붉은 마스크’는 코로나 시대 수능시험일 영어듣기평가 시간 중 갑자기 마스크가 피부로 변해 더는 벗을 수 없게 변이된 인간들의 세상을 그린다. 사람들은 변이된 변이체와 변이하지 않은 미변이체로 나뉘는데, 변이체들은 코와 입을 잃은 대신 아가미로 호흡하며 일종의 텔레파시를 통해 서로 대화한다. 이들은 총으로 쏴도 죽지않고 좀비처럼 변하기도 한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사람들은 절망하면서도 열심히 생존한다. ‘강한 견해’는 이후 16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변이체는 ‘안피류’로, 미변이체는 ‘비구류’로 불린다. ‘붉은 마스크’에서 작가의 말을 통해 “이것이 느린 멸종이 아닐까”라고 썼던 작가는 이번 작품에선 진화와 퇴화, 멸종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고 썼다. 소설은 좀더 촘촘해진 세계관을 바탕으로 재난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강한이 열여섯 살이 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느 안피류와 다른 능력을 가진 강한은 진운고에서 태어났으나 뜻밖의 사건으로 안피류들이 모여 있는 펜션 이터널에 위탁, 성장한다. 강한은 일그러진 세상에서 인간성을 되찾고자 고군분투한다. 천선란 작가는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종말 그 자체, 근래에 읽은 재난 소설 중 가장 재미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설재인 특유의 현실스런 판타지의 가차없는 냉혹함과 담담함이 매력이다.
▶세구(마리즈 콩데 지음, 정혜용 옮김, 은행나무)=현대 탈식민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리고 있는 콩데의 대표작. 18세기 세구 왕국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로 생명력 넘치는 왕국이 점차 아프리카 대륙을 둘러싼 역사의 풍파 속으로 휩쓸려가는 과정을 그렸다. 세구의 귀족 가문인 두지카 트라오레와 네 아들이 예상치 못한 길로 접어들어 겪는 고난과 시련은 당대 아프리카의 혼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프리카의 역사와 삶,문화를 생생하게 담고 있는 소설은 판타지처럼 느껴질 정도다. 독특한 이름과 음식, 의복과 주거형태, 대가족 문화, 구술시인이라는 그리오들의 노래, 앞날을 내다보고 신들과 교감하며 운명의 방향을 바꾸는 철물장인 주물사들의 주술 등 낯설면서 사실적인 이야기들이 흥미를 자아낸다. 작가는 생동하는 문체로 오랫동안 역사가 없는 땅으로 여겨진 아프리카 땅의 이야기를 발굴해 대서사시로 펼쳐낸다. 소설은 불길한 예감을 불러오는 꿈을 꾼 두지카가 흰둥이가 나타났다는 전언과 함께 왕의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데서 시작한다. 아버지두지카가 관직을 박탈당한 뒤, 장남 티에코로가 이슬람으로 개종, 세구를 떠나고 다른 세 아들도 각기 다른 이유로 뿔뿔이 흩어진다. 이들은 노예무역, 제국주의, 기독교, 이슬람과 같은 거센 변화의 물결에 휩쓸린다. 작가는 아프리카 토착민과 흑인의 편에 서서 백인과 외세를 단죄하기 보다 이들의 삶을 통해 외세 뿐 아니라 내부의 복잡성을 드러내며 보편적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해로 이끈다.
이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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