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尹 사이 암묵적 ‘안전지대’ 깬 尹 ‘적폐청산’ 발언
文이 쏘아올린 정치적 승부수 “대답하라, 사과하라”
톤다운 尹 “文과 저와 똑같은 생각…정치보복 없다”
文 ‘40%대 지지율’ 싸움 시작되나…판세 요동 주목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격노’한 문재인 대통령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그동안 대선에 개입될 여지가 있는 언행은 최대한 자제했던 문 대통령과,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 출신으로 ‘정권교체’ 기치를 내세우며 제1야당 대선후보가 됐지만 ‘문재인 정권’은 비판해도 문 대통령을 직접 저격하는 일은 피했던 윤 후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일종의 암묵적 ‘안전지대’는 윤 후보의 발언으로 해체됐다. 전면전이다.
문 대통령의 151자에 담긴 입장문은 상당히 높은 수위의 발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문 대통령은 윤 후보 발언의 논리적 모순 지점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문 대통령은 “중앙지검장, 검찰총장 재직 때에는 이 정부의 적폐를 있는 데도 못 본 척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없는 적폐를 기획사정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윤 후보가 “대답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여기에 나아가 “그리고 현 정부를 근거 없이 적폐 수사의 대상·불법으로 몬 것에 대해 강력한 분노를 표하며 사과를 요구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의 ‘역린’이 꿈틀거린 순간은 지난 5일 제주 강정마을에서 윤 후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언급하는 순간으로 꼽힌다. 윤 후보는 “2007년 노 전 대통령께서 주변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뇌에 찬 결단을 하셨다”며 “'제주 해군기지는 국가의 필수적 요소다. 무장과 평화가 함께 있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셨다"며 울컥했다.
나흘 후인 9일 윤 후보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집권하면 전(前)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할 것이냐’는 질문에 “해야죠. 해야죠. (수사가) 돼야죠”라고 답했다. 윤 후보는 ‘정치 보복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는 “제가 문재인 정부 초기에 했던 것이 대통령의 지령을 받아 보복한 것이었나”라며 “민주당 정권이 검찰을 이용해서 얼마나 많은 범죄를 저질렀나. 거기에 상응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여권의 반발에 윤 후보는 “불쾌할 일이 뭐 있겠냐”며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시간이 지나 전 정부의 문제가 적발되면 정상적인 사법 시스템에 따라 수사가 이뤄지게 돼 있다는 원론적인 말씀을 드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윤 후보는 정권교체행동위원회가 공개한 동영상에서는 "노무현 정부를 구성한 사람들은 '무조건 우리에게 이익이 되면 따라야 한다'는 식의 조직 논리 같은 게 없었는데, 여기는(현 정부) 그게 아주 강하다"며 "이 정부(문재인 정부)는 자기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계승자라고 하는데, 저는 그것이 사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7년 5월23일 취임 직후 노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에서 문 대통령은 “저는 앞으로 임기동안 대통령님을 가슴에만 간직하겠다”고 선언, 현직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에는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반드시 성공한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돼 임무를 다한 다음 다시 찾아뵙겠다”고 했다.
그랬던 문 대통령이 이례적인 ‘격노’ 메시지와 함께 노 전 대통령을 언급했다. 같은 날 공개된 세계 통신사 및 연합뉴스와의 합동 서면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의 재임 중 탄핵 후폭풍과 퇴임 후의 비극적인 일을 겪고서도 우리 정치문화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며 “아무리 선거 시기라 하더라도 정치권에서 갈등과 분열을 부추겨서는 통합의 정치로 갈 수 없다”고 밝혔다.
윤 후보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발언은 진심에서 우러나왔다는 것이 정치권의 시각이다. 윤 후보의 아내 김건희 씨는 통화 녹취록에서 “(윤 후보가) 노무현 영화 보고 혼자 2시간 동안 울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윤 후보는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팬으로 알려졌다.
‘적폐수사’ 발언 역시 윤 후보가 1시간30분간 인터뷰를 참고자료 없이 즉문즉답 형식으로 소화한 후 “TV토론 때는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묻지도 못하니 다 기사화를 해 달라”고 매체에 요청했다. 정치 공학적으로 문 대통령을 저격하기 위해 한 고도의 계산된 발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문 대통령의 ‘정치적 승부수’에 빌미를 주는 계기가 됐다. 해당 발언이 야권에서 ‘선거개입’이라라는 비판을 받을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공개한 발언이다.
문 대통령의 자부심은 ‘촛불정부’의 정체성과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 보장, 대형 부패사건이 없는 정부라는 지점인데, 윤 후보의 발언은 이를 통째로 부정한 셈이다. 검찰의 수사를 받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노 전 대통령을 언급하며 윤 후보가 울컥한 모습도 문 대통령을 자극했을 가능성이 크다. 50% 안팎의 ‘정권교체론’을 힘입어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임기가 보장된 현직 검찰총장을 사직한 뒤 대선에 뛰어든 윤 후보가 ‘적폐수사’를 언급한 것도 한 몫 했을 터다.
윤 후보는 문 대통령이 지적한 논리적 모순에 갇힌 모양새다. ‘사과하라’는 선택도 강요받게 됐다. 결과적으로 윤 후보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제1야당 대선후보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정치적 여파를 고려해 톤다운에 나섰다.
윤 후보는 “우리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늘 법과 원칙에 따른 성역없는 사정을 늘 강조해오셨다”며 “저 역시 권력형 비리와 부패에 대해서는 늘 법과 원칙, 그리고 공정한 시스템에 의해서 처리돼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그건 검찰 재직부터 정치 시작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런 면에서는 문 대통령과 저와 똑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며 “저 윤석열 사전에 정치 보복이라는 단어는 없다”고 말했다.
윤 후보의 발언에 대해 청와대는 “사과하면 깨끗하게 끝날 일”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문 대통령이 쏘아올린 ‘정치적 덫’에 걸린 윤 후보는 향후 해당 주제가 나올 경우 여권으로부터 ‘사과하라’는 요구를 재차 받을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와 여권의 요구대로 윤 후보가 사과에 나선다면 ‘보수의 상징성’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윤 후보의 발언이 의도적이든, 평소 지론이든 ‘적폐수사’ 발언으로 임기 말 대선 정국에서 현직 대통령으로 전례없는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문 대통령의 40% 안팎의 지지율과 정면 대결을 하게 됐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고 있는 지지율이다. 해당 지지율이 요동칠 경우 판세에 큰 변동이 올 수 있다.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분위기가 좋은 상황이었는데 ‘적폐수사’ 발언이 미칠 여파가 상당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