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 유엔연설 살펴보니…
[뉴욕=홍성원 기자] 각국 최고의 리더라면 누구나 한 번쯤 욕심을 낸다는 유엔총회 기조연설. 이곳 연단에 올라섰던 한국의 역대 대통령은 한반도 통일 문제를 빼놓지 않았다. 이 문제가 노태우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국가수반 5명의 연설을 관통하는 공통주제라는 건 우리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일부 대통령은 유엔개혁, 녹색성장 등의 이슈를 선도적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1988년 연설을 시작으로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5년 간격으로 이뤄진 한국 대통령의 유엔 기조연설엔 그들의 평소 스타일도 투영돼 있어 기록을 되짚는 재미를 준다.
▶노태우, 절제된 감격형=국가 정상으로 한 차례 하기도 어렵다는 유엔 기조연설을 3번이나 한 만큼 횟수를 거듭할수록 여유가 느껴졌다. 분량도 1회당 26~29분으로 후임 대통령을 압도한다. 1차 연설은 1988년. 당시 한국은 유엔 미가입 상태였다.
‘한반도 화해와 통일을 여는 길’이란 주제로 데뷔했다. 2차 연설은 유엔 가입이 확정된 직후로 노 전 대통령은 감격의 현장에서 역사를 썼다. 이런 사실과 정황을 감안하면 그의 스타일은 ‘절제된 감격형’으로 요약된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의미있는 대북제안을 시리즈로 내놓았다.
1차 연설에서 “한반도에도 화해와 평화의 따뜻한 봄이 오게 해야 한다”면서 휴전선안 비무장지대에 ‘평화시’ 건설 아이디어를 밝혔다. 평화시에서 이산가족 만남, 민족문화관, 학술교류센터, 상품교역장을 설치해 교환ㆍ교류ㆍ교역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그 해 광복절을 즈음해 제안한 남북정상회담을 언급하며 휴전협정을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대체하는 방안을 강구하자고 제의했다. 2차 연설에선 ‘대북 3원칙(휴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 남북한 실질적 군비감축 추진, 통행ㆍ통신ㆍ통상 보장)’을 밝히기도 했다. 3회차 연설에는 조바심도 읽혔다. 앞선 두 차례의 유엔 연설 이후 ‘남북 화해와 불가침ㆍ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등이 채택ㆍ발효되는 성과가 있었지만, 북측의 실천을 이끌어내지 못한 영향으로 분석된다.
그럼에도 노태우 전 대통령은 3차례 연설 동안 “한반도에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드는 날, 세계에는 확실한 평화가 올 것”, “한반도의 통일은 시간문제일 뿐 역사의 순리” “평화와 번영의 21세기는 한반도의 통일로 시작될 것”이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던졌다.
■김영삼, 원고 충실형=김영삼 전 대통령은 유엔 가입 5년차인 1995년, ‘초짜’ 회원국인 한국으로선 다소 버거울 수 있는 연설을 했다. 주제는 ‘21세기 세계공동체 시대를 향한 새출발’이다. 그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이끌어 가기 위해선 유엔의 변화와 개혁은 필수적”이라며 유엔 개혁을 위한 특별총회 개최를 제안했다. 이어 유엔의 민주화, 특히 안전보장이사회의 대표성 강화를 주요 내용으로 한 5가지 과제를 밝혔다. 이 때가 유엔창설 50주년 기념 특별 정상회의가 열린 해라는 특수성이 작용한 걸로 풀이된다. 6분 2초 가량의 연설에서 그는 준비해 간 원고를 충실히 읽었다. 각국 대표 앞에서 하는 연설에 다소 긴장한 듯 중간에 몇 차례 발음이 엉키기도 했다. 또 특유의 사투리 억양도 그대로여서 남북 통일에 관한 언급을 하는 대목에선 “나는 머지않은 장래에 한반도가 반드시 민주주의 방식에 의해 통일될 것으로 ‘학(확)신’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 확대에 관한 의지를 밝히고, 의미있는 제안을 내기도 했다. 그는 “올해 아시아그룹의 지원을 얻어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되길 희망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유엔이 성공적인 새출발을 하기 위해 앞으로 5년마다 유엔정상회의를 정례화하고, 그 첫번째 회의를 2000년에 개최할 것을 정중히 제의한다”고 밝혔다.
■김대중, 자발적 관심 유도형=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엔 기조연설(2000년)은 의외로 압축적이었다. 분량이 4분여에 불과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비교하면 7분의 1수준이다. 짧았지만, 임팩트는 강했다. 총회장에 있던 각국 대표들은 연설 직후 기립박수를 쳤다. 결정적 이유는 그가 연설 전인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한 영향이다. 전 세계가 숨죽이고 지켜본 남북 정상 악수 장면의 주인공이었던 만큼 그가 설파한 ‘남북정상회담과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연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스타일을 굳이 분류하자면 청중의 자발적 관심을 유도하는 형이다. 어려운 용어나 특별한 제안이 없어도 그의 말에 귀기울였다. 그는 “정상회담을 통해 두 정상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기로 다짐했다”고 소개하며 “적화통일도 흡수통일도 다 같이 배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통일은 우리 민족의 궁극적 목표”라며 “아무리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남북 모두가 더불어 성공하는 통일을 이룩하기로 남북정상간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노무현, 돌직구형=노무현 전 대통령은 ‘연설의 달인’답게 자신감 있는 표정과 어조로 2005년 유엔 기조연설을 4분여간 진행했다. 특히 유엔을 움직이는 강대국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돌직구’ 발언을 감행했다. 그는 “유엔 창설이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면서도 바람직한 국제질서 확립에 미온적인 유엔을 정면 비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유엔은 미래 국제질서의 거울”이라면서 “유엔의 지도력을 상징하는 안보리 개혁도 강대국 중심주의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화합을 촉진하는 개혁안이 도출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유럽연합(EU)은 힘의 논리에 기초한 질서, 반목과 대립의 질서를 극복하고 평화와 공존, 화해와 협력의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동북아에도 EU와 같은 질서가 실현된다면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가 열리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도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명박, 자기PR형=이명박 전 대통령은 두 차례(2009ㆍ2011년) 유엔 기조연설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녹색성장’ 홍보와 한국의 국제 사회 기여 활동 소개에 십분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임자들과 달리 고개를 숙여 원고를 보지 않고 객석의 각국 대표들과 눈을 맞추고 연설하려고 노력했다. 1차 연설에서 그는 “개발도상국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며 “한국은 2015년까지 ODA(정부개발원조) 규모를 2008년 대비 3배 이상 확대한다는 약속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 소개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향후 5년간 녹색분야에 매년 GDP의 2%를 투입할 것”이라며 “이는 유엔에서 권고하는 녹색투자의 두 배에 달하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물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며 “청계천을 복원해 1000만이 넘는 서울시민에게 쾌적한 휴식공간을 제공했다”고 덧붙였다. 4대강 사업도 소개했다.
그는 한국의 유엔 정회원국 가입 20주년이 되는 해에 진행한 2차연설에서도 녹색성장, ODA 지원 얘기를 반복했다. 북한 문제에 대해선 “북한이 상생과 공영의 길을 택한다면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와 더불어 이를 기꺼이 도울 것”이라고 언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