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한지숙 기자] ‘플라스틱 케이스, 96*64 화소수의 흑백 화면, 반도체칩 2개, 480킬로바이트(KB) ROM메모리, 24KB RAM메모리, 재충전이 불가능한 배터리’
미국 반도체기업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의 그래픽 계산기 ‘TI-84플러스<사진>’의 사양이다. 2004년 출시 이후 10년째 변함없는 사양이다.
미국에선 대수학을 배우는 각급 교실, SAT(대학수능시험), ACT(대학입학학력고사)를 보는 시험장에서 학생들 책상 위에 놓인 ‘TI-84플러스’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아마존에서도 그래픽 계산기 부문 판매 1위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
스마트폰이 카메라에 이어 손목시계 시장까지 ‘접수’하는 눈부시게 빠른 기술 발전 속에서도 구식 ‘TI-84플러스’가 10년째 장수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기업들이 신제품을 앞다퉈 내놓고,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격을 후려치는 무자비한 경쟁 속에서 ‘TI-84플러스’는 이례적”이라며 인기 이유를 분석했다.
TI 계산기에 대한 고객 충성도는 놀랍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NPD에 따르면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그래픽 계산기 판매량은 160만대 였으며, 이 가운데 TI의 점유율이 무려 93%에 달했다. 일본 계산기 강자 카시오는 7%로 맥을 못췄다.
가격이 더 싼 것도 아니다.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 TI-84플러스의 경우 10년째 거의 변함없이 150달러다. 소매점의 할인에 따라 싸봐야 90~120달러다. 여기에 좀 더 보태 199달러면 16기가 메모리, 1136*640 화소의 해상도가 높은 애플의 아이팟 터치를 살 수 있다. 물론 아이팟 터치에도 계산기 기능이 있다.
TI의 사업분야에서 계산기는 매우 적은 영역이지만, 영업이익률은 회사 평균 30.8%를 뛰어넘는다. TI-84플러스의 제조 비용은 제품 판매가의 10%선인 대 당 15~20달러다. 영업마진은 50% 이상이다.
결코 싸지 않은 가격에 대체재와 경쟁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TI 계산기가 시장을 평정한 가장 큰 이유는 교사 사회를 선점한 덕분이다. TI 계산기에 선생을 길들인 것이다.
TI는 1986년에 교사 대상 기술연수 프로그램을 도입, 워크숍과 온라인 강좌를 열어 자사 계산기를 활용해 효과적으로 교육하는 방법에 관해 가르쳤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교수는 현재까지 10만명이 넘는다. 일단 이렇게 해서 교사와 학교가 TI계산기를 활용한 교습법에 편해지면, 할인가 제공 등 미끼를 던질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픽 계산기 시장에서 가격 요인은 중요치 않다. 돈을 지불하는 것은 교사가 아닌 학생의 부모이기 때문이다. 제품 선택은 교사가, 제품 구매는 부모가 하는 구조다. 경쟁사인 카시오가 더 사용이 쉽고, 더 싼 제품을 내놔도, 전세를 뒤집기 어려운 이유다. 에이미 초우 카시오 코디네이터는 “이 부분이 바로 우리가 고심하는 부분이다. 교사들은 새로운 제품을 활용한 교육으로 바꾸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까 걱정한다”고 말했다.
TI 계산기 영역은 애플 아이폰도 범접하기 어렵다. 아이폰은 메모리 용량도 더 높고, 그래픽계산기 앱만 깔면 TI 계산기 못지 않은 성능의 계산기를 쓸 수 있다. 하지만 SAT, ACT 시험장에선 스마트폰을 들고 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해서 TI-84 계산기의 군림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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