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튜디오 케이’ 홍혜진 디자이너 매핑·알고리즘 등 기술접목 패션쇼 화제 미래도시 서울, 카모플라주로 재해석 푸른 숲·현란한 네온사인 의상에 투영 “IT강국 한국 기반 활동…장점 살릴 것”

▲▲ ‘더 스튜디오 케이’ 홍혜진 디자이너.
▶▶  ‘ 플래닛 래더스’와 협업해 시시각각 변하는 서울의 고유한 모습을 의상에 담은 2019 가을ㆍ겨울 컬렉션 ‘SinK-서울의 매력에 빠지다’. [더 스튜디오 케이 제공]
▲▲ ‘더 스튜디오 케이’ 홍혜진 디자이너. ▶▶ ‘ 플래닛 래더스’와 협업해 시시각각 변하는 서울의 고유한 모습을 의상에 담은 2019 가을ㆍ겨울 컬렉션 ‘SinK-서울의 매력에 빠지다’. [더 스튜디오 케이 제공]

“내 딸이 과학자의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

현역 패션디자이너였던 어머니가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중학생 홍혜진에게 건낸 말이다. 당시 소녀 홍혜진은 예술전문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공상과학 영화와 에스에프(SF) 소설을 즐겨봤다. 어머니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은 디자이너”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홍혜진은 간혹 과학자의 꿈을 꾸며 어머니가 쳐놓은 경계 밖의 삶을 동경했다.

결국 홍혜진은 어머니의 길을 택했다. 어머니 바람대로 예술교육의 ‘진액’을 수혈 받으며 자랐다. 예술이 익숙하고 좋기도 했지만 마음 한켠에 새긴 과학자의 소망은 지우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패션 업계에서 드물게 ‘가방끈이 긴’ 디자이너가 됐다. 서울예고, 서울대 디자인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로드아일랜드대에서 금속공예와 패션 디자인을 복수전공했다. 모두 실무보다 학문에 중점을 두는 학교로 과학 기술과 예술을 접목할 수 있는 탄탄한 근육을 기른 곳이다.

▶다르고 또 같은 패션과 과학=“사람들은 흔히 과학과 디자인이 상반된 분야라고 말해요. 디자인은 감성, 과학은 이성의 영역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나온 편견이죠. 그러나 저는 두 분야가 본질적으로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과학자와 디자이너 모두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구체화해 실체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죠.”

어느덧 10년차 중견 패션디자이너가 된 홍혜진은 스스로 그 사실을 입증했다. ‘더 스튜디오 케이(the studio K)’를 이끄는 그는 2009년 서울패션위크 신인 디자이너 무대인 ‘제너레이션 넥스트’로 데뷔한 후, 매년 패션과 과학을 접목한 기발한 쇼로 관중을 놀라게 하고 있다.

지난 ‘2018 봄ㆍ여름 헤라 서울 패션위크’에서는 증강현실(ARㆍ실제 영상 위에 가상 이미지를 덧씌우는 기술) 패션쇼로 화제를 모았다. 패션쇼 현장을 유튜브 영상으로 중계하면서 무대 배경에 가상의 테니스 코트, 수영장 등을 등장시켰다. 연이은 ‘2018 가을ㆍ겨울 헤라 서울 패션위크’에서도 현실의 무대가 아닌, 홀로그램 3D 영상 패션쇼를 선보였다. 관객들은 직접 패션쇼장을 방문하지 않고도 오직 스마트폰만으로 모델들의 런웨이를 감상할 수 있었다.

홍혜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매핑, 알고리즘, 홀로그램, AR…. 10년 동안 서울 컬렉션을 치르면서 구현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패션쇼는 거의 다해본 것 같아요.”

▶미래도시 서울의 감성, 카모플라주로 재해석=올해는 홍혜진이 서울패션위크에 선 지 딱 10주년이 되는 해다. 더 스튜디오 케이는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갤러리 조선에서 2019 가을ㆍ겨울 컬렉션을 선보였다.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는 일반적인 패션쇼가 아닌, 일종의 전시회 형식이었다. 이번 컬렉션의 주제는 ‘SinK-서울의 매력에 빠지다’이다. 일반 사진을 카모플라주(군복 위장 무늬)로 변환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보유한 ‘플래닛 래더스’와 협업해 시시각각 변하는 서울의 고유한 모습을 의상에 담았다. 서울의 색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소를 지정해 프로그램에 입력하면, 자동으로 색을 추출해 패턴화시키는 방식이다.

“원래 군복 위장 무늬를 만들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이지만, 컬렉션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푸른 녹지와 현란한 네온사인이 뒤섞인 서울의 면모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죠. 미래도시 서울의 낮과 밤을 포착해 네 가지 프린트를 만들고, 여기서 컬렉션을 파생시켰어요.”

▲▲ ‘더 스튜디오 케이’ 홍혜진 디자이너.
▶▶  ‘ 플래닛 래더스’와 협업해 시시각각 변하는 서울의 고유한 모습을 의상에 담은 2019 가을ㆍ겨울 컬렉션 ‘SinK-서울의 매력에 빠지다’. [더 스튜디오 케이 제공]
▲▲ ‘더 스튜디오 케이’ 홍혜진 디자이너. ▶▶ ‘ 플래닛 래더스’와 협업해 시시각각 변하는 서울의 고유한 모습을 의상에 담은 2019 가을ㆍ겨울 컬렉션 ‘SinK-서울의 매력에 빠지다’. [더 스튜디오 케이 제공]

▶‘IT 강국’ 한국에 뿌리를 둔 디자이너=그는 이런 실험정신 덕에 종종 비판에 직면한다. ‘패션쇼에서 온갖 이상한 장치를 다 쓴다’, ‘패션쇼의 본질인 옷 대신 부차적인 기술에 집중한다’는 쓴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패션과 과학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관관계가 깊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과학을 어려워하지만, 과학은 패션만큼이나 일상과 맞닿아 있다. 2~3년 사이 가상현실(VR), AR 등이 보편화된 것처럼, 과학 기술은 자연스레 삶 속으로 스며든다. 홍혜진은 “가까운 미래에 사용될 기술들을 패션 안에서도 보여줄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무엇보다 한국은 정보기술(IT) 강국이다. 실력 있는 개발자가 넘쳐나고,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도 많다. 기술 친화적인 사회 분위기도 세계 4대 패션쇼인 뉴욕ㆍ파리ㆍ밀라노ㆍ런던 컬렉션이 갖추지 못한 장점이다. 홍혜진은 자신 있게 말했다.

“한 때 4대 패션쇼를 기반으로 활동하지 못하는 것을 자책했어요. 해외로 나가면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것 같았죠. 그런데 지나고 보니 꼭 그런 건 아니었죠. 한국에 뿌리를 둔 디자이너로써 IT 강국의 이점을 잘만 활용하면, 그 누구보다 독창적인 패션쇼를 선보일 수 있어요.”

▶미래 가상공간의 패션을 그리다=“10년, 20년 후요? 언젠가는 사람들이 영화 ‘매트리스’ 속 가상공간과 유사한 곳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요?”

머지않은 미래 계획을 묻는 질문에, 홍혜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반문했다. 그는 “생각해보세요. AR이나 VR 기술을 활용해 가상공간으로 출근해 업무를 보고, 친구를 만나 사회생활도 하는 거죠. 그 때가 되면 우리가 실제 입는 옷은 의미가 없어질지도 몰라요. 가상 세계의 아바타가 입는 옷이 더 중요해지는 거죠. 미래에는 아바타의 옷을 디자인하고 싶어요.”

그는 인류가 어떤 급격한 변화를 거쳐도, 패션 산업은 견고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단지 패션을 접하는 방식만 달라질 거라는 얘기다. 홍혜진은 “저는 본질적으로 미래에 관심이 있어요. 많은 디자이너들이 복고 지향적이지만,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서 살지 않아요. 가까운 미래를 살 뿐이죠. 어떤 미래든, 저는 그 형식 안에서 새로운 패션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박로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