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링 사이클 서막 ‘라인의 황금’
시각적 과잉 속 사무엘 윤 등 성악진 기량
바그너 지켜낸 로타 쾨닉스의 세밀한 지휘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라인강의 물살은 늘 그렇듯 평온하고, 심지어 다정하기까지 하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악보의 첫머리에 적어둔 지시어는 ‘고요하고 명랑한 움직임으로(Ruhig heitere Bewegung)’, 8분의 6박자, 내림마장조의 서막을 여는 것은 콘트라베이스의 깊고 어두운 내림마 단일음이었다. 다섯 번째 마디에서 바순이, 열여섯 마디를 지나니 여덟대의 호른이 차례로 깨어난다. 그 위로 현악기가 굽이치며 어스름한 초록빛 라인강이 만개해야 할 그때, 아니 실은 ‘태초의 음향’이 빚어지기 이전부터 무대엔 한 남자가 구겨져 도사리고 있다.
지금 이곳은 어느 빈민가의 낡은 여인숙. 장기 투숙객의 행색은 몹시도 남루하다. 21세기의 풍경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퀴퀴한 방 한구석이 이 남자의 요람이다. 찐득찐득하게 뒤엉킨 수염과 머리털, 헐벗은 몸뚱이엔 땟국물이 인장처럼 얼룩졌다. 그래도 사람 구실은 하려는 듯, 남자는 때 묻은 식칼로 제 몸의 털과 손발톱을 다듬는다. 오래도록 굶주려 야성만 남은 들개처럼, 혹은 먹잇감을 기다리는 포식자처럼 섬찟한 불쾌가 감돈다. 136마디의 ‘라인의 선율’이 유유히 흐르는 내내, 무대는 단 한 줄기의 물빛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알베리히, 니벨룽족 난쟁이다. 바그너가 26년을 바쳐 완성한 필생의 역작 ‘니벨룽의 반지’는 대한민국 서울, 이 눅눅한 방에서 닻을 올렸다. 2029년까지 이어질 국립오페라단 ‘링’ 사이클 전막 자체 제작의 역사적 출발점, 오페라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이다.
1876년 독일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 4부작 전막이 초연된 지 150년 된 지금, ‘라인의 황금’은 인터미션 없이 150분간 쉼 없이 몰아치며 한국판 ‘링’의 서막을 열어젖혔다. 지난해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으로 호흡을 맞춘 연출가 로렌조 피오로니는 북유럽 신화에서 고전적 갑옷을 과감히 벗겨내고 그 자리에 21세기의 자본주의적 모순과 권력의 맹목성을 이식했다. 신비가 걷힌 자리에 남은 것은 잔혹한 ‘착취의 사다리’였다.
사다리의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라인의 황금’은 바닥을 딛고 올라서는 자들, 더 높은 층위를 오래도록 점유하려 타자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자들의 ‘핏빛 연대기’다 .
바그너가 26년에 걸쳐 빚어낸 총 15시간 분량의 4부작 대서사시 ‘니벨룽의 반지’ 중 서막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향후 이어질 세 편의 본 극(‘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을 관통할 파국의 씨앗이 잉태된 배경과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극의 골자는 신비로운 자연물이었던 황금이 어떻게 권력과 탐욕의 사슬로 변질되는가에 있다. 사랑을 영원히 포기한 대가로 라인 처녀들의 황금을 탈취한 난쟁이 알베리히는 세상을 지배할 ‘절대 반지’를 주조해 낸다. 이후 거인족에게 신들의 성 ‘발할라’ 축조를 맡긴 보탄은 그 대가로 약속한 대지를 잃지 않기 위해 기만과 폭력으로 알베리히의 반지를 강탈한다. 반지를 빼앗긴 난쟁이가 남긴 핏빛 저주가 다가올 세계의 종말을 예고하며 이 장대한 서사는 막을 내린다.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철저히 서로를 유린한다. 신들은 ‘거인 형제’의 노동력을 착취해 위대한 성을 축조하고는 그 정당한 대가를 기만하려 든다. 거인 형제는 그 죗값으로 ‘젊음의 여신’ 프라이아를 볼모로 요구한다. 사랑을 철저히 부인하고 반지의 마력을 손에 쥔 알베리히는 동족 니벨룽을 노예로 전락시킨다. 권력의 정점인 ‘신들의 왕’ 보탄은 권모술수로 알베리히를 포박해 땅속의 부를 통째로 강탈한다. 상층부의 지배자는 하층부를 통제하고 착취하며 모멸감을 준다. 탐욕의 역학 속에서 한 번 맛본 권력은 결코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
사실 오페라는 ‘악인 열전’과 다름없다. 이 무대의 서늘한 오싹함은 빌런의 악행에서가 아니라 고귀하거나 순수해야 할 자들이 자행하는 ‘위장된 악’에서 나온다. 지배계급으로서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믿는 존재들의 위선에서 비극은 잉태된다.
바그너의 대본에서 라인의 처녀들은 ‘신성한 황금’을 수호하는 대신 알베리히의 생김새를 희롱한다. 다가오면 달아나고, 손을 내밀면 비웃는다. 난쟁이가 사랑을 저주하고 황금을 탈취하도록 자극한 트리거는 모멸이었다.
신들의 왕 보탄은 ‘왕답게’ 위선의 최고봉이다. 보탄은 계약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다. 그의 창에도 계약의 문자가 새겨져 있으나, 신은 제 손으로 맺은 계약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는 기만자에 불과하다. 거인 형제를 갈취한 것도 모자라, 알베리히를 몰락시켜 황금을 빼앗는다. 도둑에게서 빼앗은 장물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는 보탄이 ‘신들의 왕’이니 신의 세계 역시 타락이 지배한다. 심지어 반지는 제 손가락에 끼려다 에르다의 경고를 듣고서야 마지못해 내놓는다. 알베리히의 악이 날것의 탐욕이라면, 신들의 악행은 질서와 정의로 직조한 ‘고상한 외피’를 둘렀다. 그렇기에 더 비열하다.
피오로니는 ‘권력의 사다리’에 동시대의 외투를 입혔다. 신화 속 황금은 신사임당이 그려진 오만 원권 뭉치로 치환됐다. 신비의 전유물이 노골적인 물신주의의 기호가 된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선 신들은 한물간 누아르 영화에서 걸어 나온 마피아 일가를 연상케 했다. 보탄은 체크무늬 슈트에 멍든 눈, 불의 신 로게는 금발 머리에 가죽 재킷을 걸치고 뒷일을 도맡는 해결사다. 발할라를 지어 올린 거인 형제는 허리춤에 연장을 주렁주렁 매단 일꾼. 사다리의 밑바닥, 니벨룽족은 도시 빈민가 뒷골목의 패거리처럼 몰려다닌다. 20세기 같기도, 21세기 같기도 한 시간. 시대를 못 박지 않은 무대엔 자본과 권력이 벌려 놓은 낙차만 선명하다.
거래의 종착지엔 ‘신체의 물화’가 뒤따른다. 샹들리에만 덩그러니 매달린 미완의 저택, 공사비 대신 인신매매되듯 넘겨진 프라이아 위로 지폐 더미가 폭우처럼 쏟아진다. 한 존재의 존엄이 종이돈의 부피로 계량되는 파국의 순간이다. 저주는 지체하지 않는다. 지폐 다발을 긁어모으던 거인 형제 사이에서 동생 파프너가 형 파졸트를 둔기로 내려친다. 반지를 빼앗긴 알베리히가 토해 낸 핏빛 저주, ‘가진 자는 근심에, 갖지 못한 자는 시기에 갉아 먹히리라’는 묵시록적 예언이 처음 실현되는 장면이다. 바그너는 이 형제 살육의 참극 위로 금관악기를 통해 ‘저주의 동기’를 다시 울린다. 탐욕의 사다리는 계층간 붕괴에만 그치지 않고, 계층 내 연대와 혈연마저도 무참히 박살 낸다.
카메라는 누구의 눈인가
무대 위엔 카메라맨 두 명이 인물을 쫓고, 고정 카메라 두 대가 구석을 지킨다. 실시간으로 찍힌 화면은 콘솔을 거쳐 다시 빚어진다. 필터를 덧입힌 어떤 장면은 오래된 명화의 질감을 얻는다. 객석에선 보이지 않는 무대 뒤편의 사건도 스크린으로 끌려 나온다. 무대 한가운데의 알베리히는 왼편 스크린에선 모공까지 드러난 거인으로, 오른편에선 장난감 같은 미니어처로 동시에 맺힌다. 권력의 팽창과 수축, 획득과 상실이 피사체의 물리적 크기를 통해 시각적으로 번역됐다.
렌즈는 권력의 시선을 닮았다. 마법 투구로 모습을 감춘 알베리히가 니벨룽족을 감시하듯, 카메라는 위에서 아래를, 뒤에서 앞을 비춘다. 객석에서 마치 몰래 훔쳐보기를 하는 듯 보인다. 렌즈가 종종 붙드는 건 약자의 맨얼굴이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 두려움에 굳은 어깨, 끝내 감추지 못한 욕망의 몸짓. 권력자의 눈에 비친 약자는 이토록 연약하다. 그 시선의 권력을 대리 체험하는 동안 관객은 묵인하는 방관자이자 공범이 된다.
카메라의 시선과 해상도가 극 내내 균질했던 것은 아니다. 라이브 카메라는 종종 초점을 잃고 흔들리고, 때론 기법 자체가 서사의 본질을 압도하는 주객전도의 오류를 범했다. 일부 장면은 모든 맥락이 읽히지 않는 무의미한 시선으로 나오기도 했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시각 이미지가 많다는 것이 극 밀도의 깊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며 “라이브 카메라로 작품의 이면이나 다층적인 결을 들여다보기보다, 카메라를 쓰고 있다는 데서 그친 장면이 꽤 많았다”고 짚었다.
지하 세계인 니벨하임에서 시각적 문법은 절정에 이른다. 원작의 알베리히는 마법 투구 ‘타른헬름’을 쓰고 거대한 뱀과 작은 두꺼비로 몸을 바꾼다. 피오로니의 무대에선 니벨룽족이 한데 뭉쳐 서로의 몸을 엮고 비틀어 거대한 파충류 형상을 주조한다. 폭군의 절대적 위력이란 결국 짓밟힌 타자의 육신을 응집시켜 세운 사상누각이라는 점을 시각화했다. 니벨하임으로 내려가는 간주곡에서 바그너는 18개의 모루를 두드려 노예 노동의 박동을 새겨 넣었다. 그 박동이 노동의 소리라면, 니벨룽족의 몸으로 빚은 뱀은 노동이 쌓아 올린 권력의 형상이다.
동시대 한국 사회를 향한 연출적 제스처는 노골적이었다, 태고의 지혜를 품은 ‘대지의 여신’ 에르다가 가체를 얹고 상의는 저고리, 하반신은 곰 인형 차림의 ‘웅녀’로 나타난다. ‘신들의 파멸’을 예고하는 장엄한 경고가 객석에선 당혹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으로 다가왔다.
허 평론가는 “에르다를 웅녀로 치환하고, 한글로 ‘탐욕은 그만’이라는 시위 팻말까지 내건 대목에서 바그너가 전하려던 의미가 지나치게 단순해졌다”며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이미지와 한글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고 꼬집었다. 각각의 신화 속 존재와 의의, 맥락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납작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으로 비친 대목이었다. 무대 언어의 과잉이 오페라가 지닌 본연의 여백이나 메시지를 앗아간 셈이다.
저주는 남고, 알베리히는 사라졌다
‘절대 반지’를 빼앗긴 알베리히는 뼈아픈 저주를 남겼지만, 그의 최후는 정리되지 않았다. 원전의 충실한 재현이라는 점에서 도리어 신선한 대목이었다. 그간 유럽 오페라에서 알베리히의 운명을 난폭하게 그려왔던 것과는 다르다.
‘링’ 사이클 안에서 알베리히는 ‘지크프리트’에서 다시 반지 주위를 서성이고, ‘신들의 황혼’에선 아들 하겐을 내세워 반지를 노린다. 다만 전주곡 첫 음부터 무대를 움켜쥐고 있던 야수의 ‘완벽한 증발’로 서곡부터 붙잡아두던 오페라의 서사적 긴장감이 진공 상태가 됐다. 모텔방에서 발화한 폭력의 근원이 묘연해진 적막은 연출적 실기이기보단 향후 3년간 휘몰아칠 파국을 예비하는 폭풍전야의 여백일 수 있다. 다만 국립오페라단은 한 해에 한 편씩 ‘니벨룽의 반지’를 이어갈 때마다 새로운 연출가를 세울 계획인 만큼 첫 작품 이후 공통의 주제 의식이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빈자리를 메우는 건 장례식이다. 원작의 마지막, 신들은 무지개다리를 건너 발할라에 들어선다. 저 아래 강물에선 라인의 처녀들이 “빼앗긴 황금을 돌려달라”며 울고, 보탄은 그 울음에 귀를 닫는다. 처녀들의 마지막 노래에 바그너가 붙인 가사는 이렇다. “다정하고 진실한 것은 깊은 곳에만 있고, 저 위에서 기뻐하는 것은 거짓되고 비겁하다”. 바그너는 찬란한 승리의 팡파르 밑바닥에 가냘프고 뼈아픈 애가를 매복시켰다.
피오로니는 청각적 아이러니를 노골적인 시각적 조소로 끄집어 올렸다. 1장에서 알베리히에게 무참히 도륙당한 라인 처녀들의 장례식장. 우아한 상복으로 치장한 ‘권력의 카르텔’은 죽음을 애도하는 척하며 그들만의 건배를 나눈다. 무대 중앙의 거대한 제단 위로 트럼펫 주자들이 늘어서고 발할라 입성의 웅장한 선율이 폭발한다. 승전고가 울리는 곳은 묘지 앞이며, 신들의 영광은 곧 시체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음악은 무대만큼 선명하지 못했다. 바그너는 피날레의 물결을 위해 하프 6대를 적어 넣었지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피트에선 2대가 그 몫을 나눠 짊어졌다. 호른도 수를 줄여 76명이 연주했다. 허 평론가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가 낯선 레퍼토리를 소화한 것치고는 선방했다”면서도 “악기 간 균형이 맞지 않아 라이트 모티프가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대목이 꽤 많았고, 동기들이 겹쳐 음악이 조금만 복잡해져도 세밀한 구조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 흐름을 끝내 붙든 건 지휘봉을 잡은 로타 쾨닉스였다. 3장과 4장으로 넘어가며 음악은 한결 안정을 찾았다. 허 평론가 역시 “음악이 큰 무리 없이 흘러가게 한 건 결국 지휘자였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한국산’ 링 사이클 무대의 최대 발견은 한국인 성악가들이었다. 알베리히 역의 사무엘 윤과 양준모를 비롯해 단일 캐스트로 무대에 선 파졸트 류지상, 파프너 김대영, 에르다 이단비 등은 그 활약이 뛰어났다. 허 평론가는 “한국에 좋은 가수가 이렇게 많구나 싶었다”며 “사무엘 윤이야말로 연기와 노래 모두에서 작품 전체를 이끌었고, 상대적으로 작은 역할인 거인들도 탄탄했다”고 했다.
‘라인의 황금’을 무사히 올린 오페라계의 과제도 분명해졌다. 당장 내년 무대에 오를 ‘발퀴레’부터는 서사의 호흡이 배 이상 길어지며 오케스트레이션의 짜임도 한층 복잡해진다. 허 평론가는 “단기간의 훈련과 연습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며 “바그너 레퍼토리를 자주 연주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체급을 끌어올리는 것이 남은 반지 여정의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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